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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23) 마지막회- 진중권과 정재승

논리와 풍자의 검을 든 남자 VS 일상이 크로스인 남자
등록 2012-02-16 13:46 수정 2020-05-03 04:26
논리와 풍자의 검을 든 모난 남자정재승이 바라본 진중권… 합리적 논거·유머·전투력·비난을 무릅쓰는 용기를 무기로 ‘권력’과 불화하는 키보드 워리어

 

 진중권 선생과 처음 얼굴을 마주한 건 10년 전 일이지만, 또 그와 글을 함께 쓰기 시작한 건 3년 전 얘기지만, 내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와 함께 어울렸다. 유시민과 진중권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는 사자성어, 재승박덕. 하는 말은 맞지만 말하는 방식이 밉상이라며,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다고 그들을 감정적으로 비판할 때, 사람들은 내 이름을 사용한다. 나는 우리가 진한 인연으로 언젠가 만나게 될 줄 진작에 알았다.

 

논객의 본분에 충실하려는 노력 

 진중권 선생과 글을 함께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실제로 만나보면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그가 사석에서도 전투적인 어법을 사용하는지,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닌지 궁금해들 한다. 이 글의 독자들도 아마 비슷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의 글에서 종종 풍기는 피비린내 나는 독설이나 냉소적인 비아냥은 그의 일상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실상 조용한 편이고 덜 사회적이며 공격적인 어투를 별로 즐기지도 않는다. 먼저 말을 건네지 않으면 스스로 말을 꺼내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잘 드러내지 않으며 상대방의 개인사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자주 만나도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려는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앗, 경비행기 얘기랑 필리핀 세부 술집 얘기 빼고.) 사회적 이슈나 학문적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그는 훨씬 더 즐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거울신경세포가 발달한 ‘두정엽형 인간’이라기보다는 추상적 사고가 발달한 ‘전전두엽형 인간’에 더 가깝다. 최소한 나 같은 ‘남자’ 앞에선.

 사회적 이슈에 대해 사람들이 대개 ‘예’라고 생각할 때 그가 ‘아니오’라고 말하며 격한 논쟁도 불사하는 것을 보고, 혹자는 그가 공명심이나 유명세에 안달 나서 주목받으려고 그러는 거라는 둥 피학적인 심성이 있어 악플을 즐긴다는 둥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건 그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개인적인 관찰에 따르면, 그의 그런 태도와 행동은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논객의 본분’에 충실하려는 노력이며, 자신의 판단과 미감에 솔직하려는 ‘시대와의 불화’에 기인한다. 아니, 20세기엔 박정희나 조·중·동 같은 독재권력·언론권력·보수권력과 싸웠고, 21세기엔 황우석 사건, 영화 논쟁 등 대중집단적 파시즘과 싸워왔다는 점에서 논객으로서의 그의 삶은 ‘권력과의 불화’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리라.

 사회적 이슈가 터졌을 때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 ‘심사숙고를 통한 복기’를 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곧바로’,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제안하는 논객의 업무에 늘 열심이다. 또 자신이 판단하기에 옳지 않거나 미학적으로 촌스러우면, 그걸 굳이 ‘틀렸다, 촌스럽다’ 대놓고 말해야 속이 시원한 ‘모난 성격의 소유자’다. 영화평론가들을 대신해 의 지지자들과 싸워주었듯, 황우석의 지지자들과 대신 싸워주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 일러스트 김중환

» 일러스트 김중환

 

세상을 낯설게 보는 지혜 

 그가 전투적인 ‘게시판 댓글 싸움’을 즐기는 건, 유명해지려는 노이즈마케팅 차원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원래 그래왔기 때문인 것 같다. 언젠가 내게 얼핏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과 언쟁하길 즐겼다고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철칙이 뭔고 하니 바로 “약오르면 지는 거”라는 것. 이 철학을 그는 지금도 인터넷 게시판과 트위터에서 금과옥조처럼 지키는 것 같다.

 그래선지 그는 글로 남을 놀리고 약올리고 비웃는 데는 정말 ‘국내 최강’이다. 그는 남들이 아무리 비판하고 막말을 해도 더한 독설로 응수한다. 읽는 사람이 통쾌할 정도로. 그의 박학다식, 사회적 이슈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 냉소와 풍자가 질펀하게 밴 유머, 어느 것 하나 안 부러운 게 없지만, 그중 가장 부러운 것은 바로 수많은 사람들과 논쟁하고 비난을 받더라도 상처받지 않고 끄떡없이 버티는 ‘표도르급 맷집’이다. 99개 칭찬보다 하나의 비판에 상처받고 곧바로 반성 모드로 들어가는 나로서는 그의 담대함이 늘 존경스럽다. (보수주의자들의 비난에는 전혀 상처받지 않던 그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진보 진영으로부터의 비판과 몰인정만은 그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20세기, 수많은 논객들이 세상에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살아남아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그 직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진중권뿐이다. 그건 그가 합리적인 논거, 통쾌한 유머, 시원한 전투력,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에 휩쓸려가지 않고 쏟아지는 비난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리라. 특히 ‘촛불시위’를 기점으로 논객으로서의 사회참여 방식이 ‘21세기형’으로 진화한 것도 그가 오래 살아남는 데 크게 기여했다. 논리와 풍자라는 검으로 권력의 모리배들과 전투를 벌이는 걸 게임처럼 즐기고 대중과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을 하는 그는 ‘키보드 워리어’다.

 그처럼 전투적으로 싸워줄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그러면서 늘 사회적 약자 편에 서주는 논객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행운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논쟁을 벌였던 유시민, 강준만, 김규항, 의 통찰력 역시 더없이 소중하다. 때론 동의할 수 없고 때론 불편하기도 하지만, 우리 시대는 그들의 논쟁에서 세상을 배우고 우리 사회를 낯설게 보는 지혜를 얻는다.

 그가 논객으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추정과 음모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합리적인 추론과 증거 중심의 사고를 했다는 것, 이른바 ‘우리 편 철학’과 패거리 사고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 진영에라도 입바른 소리는 하고야 마는 객관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과학자인 나에겐 사회적 이슈 때마다 달리는 그의 발언이 대체로 타당하게 들린다. (“크로스엔 날 선 논쟁이 없다!”며 독자들이 심심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게 우리 콘셉트예요!)

 만화가 강풀에 따르면, 진중권 선생이 맞는 말을 하면서도 대중에게 욕을 먹는 건 결국 나중에 자신의 말이 맞았다고 결론이 났을 때 멋있게 가만히 있어주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고 “거봐, 내 말이 맞았지?” 하며 끊임없이 트윗글을 쏟아내기 때문이란다. 동의한다.

 

우리의 ‘크로스3’는…?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늘 그가 쏟아내는 사회적 발언이 화제에 오르다 보니 그가 성실한 미학자이며 특히 ‘기술미학’ 분야에서 많은 작가를 국내에 소개하고 꾸준히 탐구하는 연구자라는 사실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다음번 그와의 크로스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현대 미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학술서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몽상해본다.

 요즘 그가 변했다며 그의 트윗글을 지겨워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최대 단점 하나를 폭로한다. 그가 평소 스스로를 ‘장동건·원빈급으로 잘생겼다. 미학적으로 완벽하다’는 취지의 트윗글을 종종 남기는데, 이게 ‘진심’이라는 것. 자신을 ‘조각미남’이라고 믿는 이 ‘각진 남자’는 자신의 외모를 평가할 때만은 평소 그가 보여준 고급스런 미적 취향을 전혀 발휘하지 않는다는 게 큰 흠이다. 호전의 기미가 전혀 없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

<hr>일상이 크로스인 남자진중권이 바라본 정재승… 복잡한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말하는 스토리텔러, 예술과 인문학까지 넘나드는 통섭형 인간

10여 년 전 문화방송의 차인태 아나운서가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2주간 대타로 라디오 프로그램(<mbc>)의 진행을 맡은 적이 있다. 첫 방송 진행 경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짭짤한 출연료로 인해 아직까지 그 방송은 내게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정재승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마침 섭외된 인물이 의 저자 정재승. 책의 내용을 설명하다가 예를 들기 위해 책을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군더더기 없는 과학 커뮤니케이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어느 출판사 직원의 주선으로 그를 동국대 앞에서 다시 만났다. 당시 예술과 과학기술의 통섭에 관심 있던 나는 그에게 언젠가 이 주제로 책을 같이 쓰자고 제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최근의 기술이나 예술의 문제에 인문학적 관점과 자연과학적 관점을 교차시키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꺼낸 제안이었다. 뚜렷한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실현 가능성도 크지는 않았다. 그 제안은 그렇게 잊혀졌다.
또 몇 년이 지나, 그 출판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크로스’라는 제목으로 에 연재를 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묶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정재승 선생이 몇 년 전 동국대 앞에서 내가 한 그 제안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원래 내가 제안한 것은 상아탑을 위한 하드코어 이론 작업이었다. 하지만 출판사가 들고 나와 내민 기획은 일반 대중을 위한 글을 주간지에 연재한다는 소프트코어 작업이었다.
그 때문에 한편으론 시큰둥한 마음도 있었지만, 파트너가 정재승 선생이므로 나름 흥미로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가 어떤 글을 쓸까 호기심도 컸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다. 연재를 시작한 이후 자연스레 둘이 접촉할 기회도 늘어나, 이제는 내가 정재승 선생의 수업에 초청받아 카이스트에서 특강을 하면, 정재승 선생은 나의 부탁으로 내가 관계하는 ‘기술미학연구회’에서 특강을 하는 식으로, 강의로도 ‘크로스’를 실천하는 사이가 됐다.
불행히도 뇌과학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정재승을 평가할 능력은 내게 없다. 아마 그가 쓴 논문은 내게 그냥 외계어로 보일 것이다. 내가 첫눈에 알아본 것은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능력이다. <mbc>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설명해내는 능력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 그는 글 못지않게 말도 매끈하여,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명확한 언어로 사안의 핵심을 쉽게 이해시키는 능력이 있다.
실제로 그의 특강을 몇 차례 들은 적이 있다. 항상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시각자료와 더불어 흘러가는 그의 강연에는 모종의 ‘스토리텔링’이 있다. 그리하여 ‘뇌과학’을 주제로 한 강연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흘러가는 것이 잘 짜인 기승전결을 가진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커뮤니케이터는 단지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수준을 넘어 동시에 재미있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정재승 선생의 강연에는 ‘과학적 극작술’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과학은 물론이고 예술과 인문학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 사회에서 보기 힘든 ‘통섭형 인간’이다(이를 상징하듯이 그를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린 책 의 구성은 악곡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령 과학·예술·인문학의 세 분야를 자유로이 횡단하면서 그는 ‘과학의 눈으로 본 예술’ ‘인문학의 눈으로 본 과학’ 등 다양한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낸다.

» 2011년 6월9일 저녁 서울 광화문 해치광장 계단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실현을 위한 커피파티’에서 토론에 참여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왼쪽)와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 2011년 6월9일 저녁 서울 광화문 해치광장 계단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실현을 위한 커피파티’에서 토론에 참여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왼쪽)와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사회적 지능의 자연스런 발현
대중을 상대로 한 저서와 강연을 통해 그는 어느덧 ‘과학의 대중화’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됐다. 사회를 위한 그의 기여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과학자들의 ‘재능기부’를 받아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방을 찾아가 그곳 사람들에게 수준 높은 과학적 교양을 선사하는 것도 그가 이 사회를 위해 하는 일 중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일간신문의 칼럼을 통해 사회적 문제에 대해 부드러우나 날카로운 발언을 쏟아놓기도 한다.
그의 사회적 실천, 사회에 대한 배려는 어떤 정치적·이념적 대의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내가 그의 인성 중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것, 즉 그의 ‘사회적 지능’의 자연스러운 발현일 것이다. 옆에서 지켜본 정재승은 세상의 그 어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처음 전학 와서 어색해하는 아이에게 제일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주는 급우, 혹은 누구라도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싶은 ‘테디베어’ 같은 친구다.
골목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모여 논다고 하자. 그 중심엔 마치 자석처럼 다른 아이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한 아이가 있을 게다. 그게 정재승이다. 이것이 내게 비친 그의 인상이다. 실제로 그는 어딘지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구석이 있다. 정재승이라는 고리를 거치면 대한민국의 모든 이와 연결될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실제로 최근에 내가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한 달에 한 번꼴로 주최하는 사적인 술자리에서 만났다.
이것이 크로스 시즌2의 마지막 원고인 것으로 안다. 크로스의 취지는 원래 통섭의 정신에 있다. ‘영국의 정재승’이라 할 수 있는 C. P. 스노는 일찍이 1950년대에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간극이 너무 벌어진 것이 영국이 쇠망하는 원인이라 진단한 바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아날로그 매체들의 질적 차이를 지워버리듯이, 21세기에는 더 이상 ‘전문화’로 특징되는 근대적 정신문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두 문화는 대화를 나눠야 한다.
사실 정재승 선생이 하는 작업과 내가 하는 작업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나 역시 한편으로는 철학이나 인문학의 지식을 대중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을 예술과 과학기술과 결합시키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통성이 그와 나를 이 기획 속에 하나로 묶어주었을 것이다. 인문학이 과학에 자신을 열어놓고, 과학이 인문학에 시선을 돌릴 때, 나와 정재승 선생 사이에서 이루어진 즐거운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은 대화해야 한다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애초에 나의 하드코어 제안, 즉 예술-인문학-자연과학의 통섭을 위한 본격적인 이론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우리 사이에는 크로스 ‘시즌3’가 남은 셈이다. 그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이 지면 밖의 일일 것이다. 언젠가 그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그때 가장 먼저 다룰 영역은 뇌 과학과 예술의 중간지대를 이루는 ‘신경미학’(Neuro-aesthetics)이 되지 않을까?
통섭에도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에 정재승 선생 같은 상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게 개인적으로 큰 행운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에게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그가 나만큼의 미모만 가졌더라도, 그는 지금 가진 것보다 몇 배의 사회적 영향력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정재승 선생에 관한 글을 쓴다고 트위터에 올렸더니, 여러 트위터러로부터 그를 꼭 “미학적으로 디스”해달라는 간곡한 주문이 올라왔다.)
진중권 문화평론가</mbc></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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