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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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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19) 자살

자살의 철학 VS 왜 인간만 자살을 하는가
등록 2011-12-07 17:35 수정 2020-05-03 04:26
자살의 철학

서구 철학자들의 논거로 바라본 자살… 자신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인가, 생의 완성인가, 죽음을 향한 충동의 발현인가

‘자살’이라는 문제만큼 동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대의를 위해 목숨 끊는 것은 유교문화권에서는 충분히 이해되고, 심지어 상찬받는 행동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열사’가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문명에서 자살은 큰 사회적 금기에 해당한다. 심지어 가롯 유다의 가장 큰 죄는 예수를 판 게 아니라 자살한 데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기적 죽음과 이타적 죽음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을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로 구별했다. 유교문화권에서 상찬받는 자살은 일반적으로 자기 ‘안’의 동기로 인한 이기적 자살이 아니라, 자기 ‘밖’의 대의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이타적 자살에 해당한다. 동양에서도 개인적 동기를 위한 자살은 설사 인간적으로 이해될지언정 사회적으로 권장되지는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동양에서는 자살에 관한 기독교적 편견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이타적 자살의 예는 보기 드물다. 하지만 기독교 문명 안에서도 ‘어떤’ 자살은 과거에 사회적 상찬의 대상이 되곤 했다. 동양의 열사에 해당하는 것이 서양의 순교자다. ‘순교’란 사실상 자살에 해당하나, 순교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은 씻지 못할 죄에 해당해도, 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최고의 덕목이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신처럼 이기적인 분도 없다.

자살의 금기는 당연히 권력의 책략이다. 권력은 죽음의 공포를 통해 작동하는 법이다.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사회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성원들이 사회라는 놀이판에서 스스로 퇴장하는 일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자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만큼 우스운 게 있겠는가. 그래서 내세의 형벌로 협박하면서까지 자살을 막으려 했던 것이리라.

자살에 반대하는 가장 일상적 논거는 ‘자살은 일시적 문제에 대한 영원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시적’ 고통을 피하려고 ‘영원히’ 목숨을 버리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그 일시적 고통이 그보다 긴 삶의 행복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크고 강렬하다면, 차라리 자살을 택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자살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런 느낌에서 나름의 합리적(?)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철학적 자살론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칸트의 반론일 듯하다. 먼저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이 되게 하라’는 명법에 따라, 그는 자살이라는 해결책을 일반화할 수 있는지 묻는다. 당연히 안 된다. 설사 너는 자살을 하더라도, 네 자식에게까지 그것을 권하겠는가? 이어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명법에 따라, 그는 자살이 자신을 (자기 안팎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라 주장한다.

쇼펜하우어와 같은 낭만주의자는 비교적 자살에 관대한 견해를 보였다. 어차피 개별적 의지는 파괴돼 근원적 의지와 합일하는 게 삶의 목적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단순한 자살은 무가치하다고 보았다. 다만 해탈하려고 자신을 서서히 굶겨 죽이는 고승처럼 인생의 근원적 고통을 충분히 맛보는 자살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생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제 삶을 그렇게 완성하지는 않았다.

일러스트 김중화

일러스트 김중화

자살의 권리가 있는가

이처럼 자살에 관한 철학에도 찬반 양론이 존재하나, 역시 우세한 것은 반대론이다. 심지어 인생의 근본적 무의미를 주장하는 실존주의자까지 쇼펜하우어처럼 삶의 부조리를 끌어안고 견디라며 자살에는 반대하는 견해를 취했다. 철학적 견해는 서로 달라도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데는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일까?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회보다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의 관점이리라.

하지만 자유주의자들 역시 자살이라는 문제에는 견해가 엇갈린다. 먼저 고전적 자유주의자의 견해를 보자. 존 스튜어트 밀은 그 유명한 에서 자유의 필요조건은 ‘결정 내릴 권리’라 주장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자살은 금지돼야 한다. 자살은 개인에게 미래의 결정을 내리는 걸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살은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몇몇 현대의 자유주의자는 자살의 권리를 주창한다. 개인의 생명은 그 자신에게 속하므로, 타인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자들은 과연 생명마저 소유물로 볼 수 있느냐고 반박할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장 아메리다. 그는 에서 자살이야말로 “인간성의 궁극적 자유”에 속한다고 열렬히 설파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발언에 따르는 공약의 부담을 기꺼이 졌다.

‘나는 사유한다’(Cogito)의 차원에서 자살의 윤리적 문제에 접근한다면, 정신분석학은 ‘나는 욕망한다’(Libido)의 차원에서 자살이라는 심리적 충동을 설명하려 한다. 전기의 프로이트가 주로 성적 충동에 매달렸다면, 후기의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삶의 충동’과 더불어 ‘죽음의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처음부터 죽음을 향하는 충동 또한 들어 있다는 얘기다.

쇼펜하우어의 자살론도 어쩌면 이 무의식적 욕망의 산물인지 모른다. 나아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자극에서 벗어나 궁극적 평온에 도달하고픈 충동을 종교적 계율로 체계화한 것이 아닐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종종 자신을 겨냥한 이 죽음의 충동을 밖으로 표출한다. 한마디로, 타인을 향한 공격인 파괴나 살인은 죽음의 충동이 외면화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역시 자살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오랜 시간 암에 시달린 프로이트는 1939년 자신의 주치의에게 더 이상의 투병 생활은 “고문에 불과하고, 아무 의미도 없다”며 자신의 목숨을 끊어달라고 부탁한다. 프로이트의 딸은 아버지의 그 결정에 반대했으나, 결국 주치의의 설득으로 아버지의 안락사에 동의한다. 1939년 9월23일 프로이트는 다량의 모르핀 주사를 맞고 숨을 거둔다.

아우슈비츠 같은 삶의 압박

독일의 평론가 발터 베냐민은 ‘파괴적 성격’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파괴적 성격은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정이 아니라, 자살이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감정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그 역시 국경을 넘지 못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할 위험에 처하자, 다량의 마약을 복용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삶’에 비하면 스페인 국경에서의 ‘자살’은 확실히 할 만한 가치가 있었으리라.

우리 사회에서 ‘자살’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보면, 자살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동시에 사회적 차원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언론 보도를 통해 듣는 자살의 사연은 주로 해고로 인해 살길을 잃은 노동자나, 성적의 압박에 시달리는 수험생에 관한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몇몇 성원들에게 우리 사회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게 그저 우울증에 시달리는 환자의 주관적(?) 느낌에 불과할까?

진중권 문화평론가


왜 인간만 자살을 하는가

사회적이고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인 죽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결심한 인간의 의사결정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나

미안한 말이지만, ‘세상의 모든 생명은 소중하며 존엄한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그 자체로 부도덕하므로 절대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훈계나 위로를 듣고 싶다면 이 페이지를 그냥 넘기시라. ‘최근 한국 사회에선 양극화로 인해 자식에게 신세지고 싶어 하지 않는 노인들의 자살이 급증하고, 경쟁사회에 내몰린 청소년들의 자살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어, 이를 위해 우리 사회가 자살 문제에 발벗고 나서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메시지를 원한다면 다른 글을 뒤져보시라.

자살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의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로서, 선택을 하는 순간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탐구하는 신경과학자로서, 내 주된 관심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국 자살이라는, 대개의 생명체들이 하지 않는 선택을 시도하는가’다. 생명체로서의 본능에 반하는 의사결정이라는 점에서, 이보다 더 파국적인 선택이 없다는 점에서 자살에 대한 연구는 의사결정 연구의 핵심이다.

실제로 자살은 인간만이 하는 행위로 알려졌다. 자살하는 동물로 알려진 레밍도 실은 자살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으며, 자살로 보이는 투신 행위는 이동 중에 겪는 사고사일 뿐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자해, 혹은 그로 인한 죽음은 동물에게서 종종 발견되지만,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차원의 자살은 아직 다른 동물에게서 발견된 적 없다는 점에서, 자살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자살은 생각보다 흔한 ‘이상 행위’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그 비율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15%의 성인이 ‘한때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다’고 했고, 5% 내외의 사람들이 ‘자살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계획한 적 있다’고 고백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10년 자살에 의한 사망자 수는 총 1만5566명,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자살률(11.3명)보다 3배나 높아 회원국 중 1위를 기록했다. 특히 20대 사망 원인의 44.9%, 30대 33.9%, 10대 24.3%가 자살이라고 하니, 이들 연령대에서 전체 사망 원인의 3분의 1이 자살인 셈이다. (자살률을 줄이려면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2005년 무렵까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던 일본은 매년 3천억원을 투자해 자살의 사망 원인 비율을 19.7%로 줄여 유지하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노인 자살’이다. 2009년 우리나라 노인 자살 사망자는 무려 5051명으로, 자살에 의한 사망이 지난 10년간 3배 이상 급증했다. 75살 이상 연령에서 자살 사망 사례가 OECD 국가들의 약 8.3배다. 대부분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부모의 심정’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이라서 가슴이 아프다.

‘사회적이고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인’ 자살의 원인은 실로 다양하다. 타인에 대한 모방에서부터 경제적 궁핍, 인간적 모멸감이나 무기력감 등 사회적 원인을 비롯해 세토로닌과 도파민 부족, 코티졸 이상, 그리고 유전적 원인 등 생물학적 원인이 포함돼 있다. 물론 우울증과 알코올중독, 약물중독도 무시할 수 없는 위험 인자다.

내가 자살에서 각별히 관심을 두는 부분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떤 특징이 내재돼 있는가다.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은 여성이 2∼3배 더 많지만, 자살에 성공하는 사람은 남성이 4배 정도 더 많다. 성호르몬이 관여돼 있나 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아론 티 벡 교수가 만든 ‘자살의지 척도’를 적용해보면,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이 항상 정말 죽으려고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더라도 자살은 모든 시도자에게 ‘심각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자살은 충동적인 의사결정일까, 아니면 계획적·절차적 산물일까? 자살자가 남긴 유서의 대부분이 생각보다 침착하게 작성되고 논리적 모순이 적다는 점에서, 또 자살 시도자들은 대개 의사를 찾아가 자살 의지를 상담받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살 의지를 자주 암시한다는 점에서, 자살은 설령 충동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오랜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여겨진다.

119 구조대원들이 한강대교 남단에서 한강에 투신한 사람의 주검을 찾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119 구조대원들이 한강대교 남단에서 한강에 투신한 사람의 주검을 찾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시대·민족·지역마다 다른 자살의 방법

자살 시도자들이 죽기로 결심한 순간, 가장 먼저 뭘 결정할까? 바로 자살하는 방법이다. 영국의 시인 토머스 채터턴은 “죽는 건 오직 한 번뿐인데, 그것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밧줄이든, 가터든, 독약이든, 총알이든, 칼이든, 서서히 쇠해가는 병이든, 급소의 동맥이 갑작스레 터져버리든, 인생의 고통을 끝내준다는데. 이유야 많고 많겠지만, 결과는 하나, 누구든지 하나의 범상한 소멸로 나아가기 마련”이라고 했지만, 자살 방법은 자살 시도자들에게 중요한 의사결정이다.

“각 민족마다 선호하는 자살 방법이 있으며, 선호하는 방법들의 순위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라고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1897년 쓴 글에서 말했지만, 실제로는 시대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선호되는 자살 방법이 달랐다. 한 예로, 19세기 러시아인들은 목매기를 선호했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인들은 독약을, 이탈리아인들은 총기를, 미국인들은 총기와 약물을 선호했다.

같은 나라라도 지역마다 선호하는 자살 방법이 다르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독살과 목매기가 가장 많이 일어나지만, 펀자브 지방에서만은 예외적으로 자살사건의 55%가 철로 위에 눕거나 달리는 기차를 향해 뛰어드는 방법을 취했다. 벨기에의 남쪽 지역에서는 독약을 많이 사용하는 반면, 역사적으로 사냥문화가 강하게 자리잡은 산림 지역에선 총을 주로 사용하고, 고층빌딩이 많은 브뤼셀에서는 투신자살이 더 자주 일어나는 것처럼.

옛날과는 달리, 현재 미국에서는 전체 자살의 60% 이상이 총기 자살이라고 한다. 목매기와 약물과다 복용이 합쳐서 25% 정도를 차지하고, 가스흡입·투신·익사 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자살자들은 과연 무엇으로 자살 방법을 결정했을까? 사망에 성공할 확률, 상징적 의미, 단순한 모방, 아니면 죽기 전까지의 고통? 과연 무엇이 자살 방법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까?

(뿌리와이파리 펴냄)를 쓴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접근성’이다. 구하기 쉬운 재료, 접근이 가능한 방법으로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총기를 쉽게 구하므로 총기 자살이 흔하고, 중국·싱가포르·스리랑카·인도 같은 나라들에서는 독이 든 열매나 식물, 맹독성 살균제를 구하기 쉬워 이를 이용한다.

자살의 ‘성공 가능성’도 중요하다. 투신이나 총기 자살은 성공 가능성이 높지만, 약물의 경우에는 자살을 시도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그사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자살 시도자가 스스로 응급실을 찾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러니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는, 이왕이면 고통이 적은 방법을 선호한다.

미국의 병리학자들에 따르면, 28가지 자살 방법 중 ‘치명성’이라는 관점에서 순위를 매겨보면 단연 총상과 청산염이 선두의 1위와 2위이고, 폭발물, 기차에 치이는 행위, 투신을 그다음으로 뽑았다. 여성은 외관 손상에 신경 쓰기 때문에 약물복용을 선호하는 반면, 남성은 투신이나 총기 사용을 ‘좀더 사나이답다’고 여기는 듯하다고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은 기술하고 있다.

해부할 수 없는 ‘균형이 깨진 정신’

한때 자살은 법적으로 금지됐고(특히 노예의 자살!), 영웅적 자살은 국가적으로 추앙받기도 했으며, 고대 스토아 학파처럼 자살이 권리가 아닌 ‘의무’에 가까운 시절도 있었다.

게르트 미슐러가 (시공사 펴냄)에서 주장했듯이, “자살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로서 자살을 인간의 주체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라는 개인의 권리에 권력, 국가, 사회, 종교, 윤리가 왜 개입하는가”라는 질문에 게르트 미슐러는 “어느 사회, 어느 문화에서도 인간에게는 스스로 죽을 권리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자살이 금기시되고 죄악시된 것은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국민 만들기’에 국가가 혈안이 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살이 인간만의 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만의 복잡한 의사결정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복잡한 과정을, 그들의 황폐한 우울을 어찌 전부 해부할 수 있으랴. ‘균형이 깨진 정신’이 행한 일을 어찌 우리가 이해할 수 있으랴. 다만 죽음이라는 방식을 통한 한 사람의 ‘고통스런 절규’는 그 곁의 수많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슬픔과 반성, 후회와 회한을 안긴다.

자살이 비극인 이유는 자살한 자가 겪어온 고통이 자살의 순간, 살아남은 자들에게 고스란히 건네지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남은 인생 동안 그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죽음은 한 사람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비극이기에 죽음을 애도하는 종은 우리 모두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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