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적인 것이 아름답다는 해괴한 감성… 근대 개발주의 이데올로기와 인간을 기계에 뜯어맞추는 산업혁명의 테크놀로지에서 비롯해
4대강이 준공됐다고 관제 언론에서 요란하게 떠든다. 사회가 마치 1970년대 각하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4대강 사업은 즉흥적으로 결정된 사업. 원래 대운하를 건설하려다 못하게 되니, 정권에서 부랴부랴 그 대안으로 들고 나온 애드혹 정책이다. ‘대운하’냐, ‘4대강’이냐의 물음은 적어도 각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게다. 그저 그에게는 7% 성장을 위한 대규모 토목사업이 필요했을 뿐이리라.
백로 알이냐, 백로 알 구조물이냐
4대강 사업은 ‘건설업 경기를 활성화해 고도성장을 하겠다’는 각하의 의지 표현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이 사업의 고용효과나 파급효과는 극히 제한된 것으로 드러났다. 각하는 즐겨 이 사업을 경부고속도로와 비교한다. “지금은 반대하지만 준공되면 다들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4대강은 베트콩의 호찌민 루트가 아니다. 부산항에 들어온 컨테이너 물동량을 자전거 부대로 나를 생각인가?
홍수를 예방한다 하나, 홍수 피해가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없다. 4대강 유역의 홍수 피해는 원래부터 극히 미미했다. 외려 이 사업으로 두부침식으로 도로가 붕괴하고 다리가 무너졌다. 재퇴적으로 막대한 준설비용도 더 들어갈 것이라 한다. 유입되는 수량의 증가로 수질이 개선된다? 이건 그냥 농담한 것으로 치자. 정부는 지천 정비를 위해 새로 20조원가량의 예산을 요청함으로써 4대강 사업의 실패를 자인했다.
덕분에 우리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긴 자전거도로를 갖게 됐다. 하지만 이로 인해 기뻐하는 것은 외려 중국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사용되는 자전거의 99%는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즐겨 타는 이들이야 그나마 도로가 생긴 것을 기뻐할지 모르겠으나, 자전거를 끌고 인공으로 조성한 환경을 보러 직접 4대강 유역까지 찾아갈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적이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그동안 지겹도록 해온 것. 그러니 문제를 좀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보자. 내게 가장 황당했던 것은, 백로가 살던 터전을 없애고 거기에 백로 알을 형상화한 인공구조물을 갖다놓았다는 소식이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다. 문제는 이 ‘미친’ 감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게 아름답게 느껴질까? 각하의 이 해괴한 감성은 근대의 개발주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
각하의 미감을 파악하려면, 자연미와 예술미(인공미)의 관계에 관한 18세기 미학 논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에 낭만주의자들은 자연미를 예술미 위에 올려놓았다. 가령 칸트에게 자연은 인공의 모범, 위대한 예술은 자연처럼 보여야 한다. 실제로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작품 속에서는 마치 자연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낭만주의적 관념 속에서 인간은 대자연에 포섭된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헤겔과 같은 고전주의자들은 예술미의 우월함을 믿었다. 왜 예술이 필요한가?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의 결함 때문이다. 자연은 불완전하기에 그것을 인공미(예술)로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생각은 근대 개발주의 이데올로기의 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뜯어맞춰라. 카를 마르크스까지도 이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연의 인간화. 그것이 진보다.’
산업 이후의 사회, 다시 자연으로
산업혁명은 개발 이데올로기의 기술적 실현이었다. 이후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원의 보고’, 즉 마음대로 꺼내다 쓸 수 있는 자원의 창고다. 여기에는 좌우의 차이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자연을 착취해 얻은 결과물을 ‘사적으로 분배하느냐’ ‘사회적으로 분배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의 강령 한 구절. “자연은 공짜로 존재한다.”
이것이 헤겔의 ‘주객동일성’ 원리의 현실적 함의다. 주체(인간)와 객체(자연)의 동일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자연에서 오직 인간의 필요에 적합한 것만 본다는 걸 의미한다. 가령 A와 B를 잇는 최단 코스는 직선이라는 명제에 따라 숲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설하면, 숲의 생명은 끊어지고 동물들의 생태계가 파괴된다. 각하도 4대강에서 오직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것도 온갖 수치를 왜곡해서 본다.
이로써 자연의 진짜 자연스러운 모습은 간단히 파괴된다. 물론 개발을 통해 우리는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나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이제는 거꾸로 인간이 자연을 위협하게 됐다. 한동안 인간들은 자신도 자연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연의 복수가 인간의 생체에 미치기 시작하자, 이 미친 개발주의의 무덤에서 서서히 생태주의 의식이 자라난다.
이 변화는 서구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산업 이후 사회로 이행하는 시점에 발생했다. 산업사회의 목표가 자연력을 인공력으로 바꾸어놓는 데 있었다면, 산업 이후 사회에서는 외려 인공력으로 자연력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가령 빗방울을 튕겨내는 나뭇잎의 오돌토돌한 표면을 모방하면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을 만들 수 있다. 이 미메틱 테크놀로지야말로 산업 이후의 새로운 기술의 상징이다.
인터페이스의 관점에서 접근해보자. 가령 산업혁명의 인터페이스는 기계에 인간의 신체를 뜯어맞춘다. 한마디로 인간이라는 생명체마저 기계로 바꾸어놓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들에게는 군대식 규율이 요구됐다. 인간의 직업군 중 가장 기계에 가까운 것이 바로 군인이 아닌가. 아마 각하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도 이런 것이리라. 명령에 따라 삽질하는 기계로서의 인간.
정보혁명의 시기에는 역전이 일어난다.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목표는 생체를 기계에 맞추는 게 아니라, 기계를 생체에 맞추는 데 있다. 최근 유행하는 ‘디지로그’라는 말은 이 생체친화적(Ergonomics) 기술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디지털은 순수 수학적(0, 1) 기술이나, 우리는 그것을 이용한 장치를 거의 아날로그 세계의 대상처럼 다룰 수 있게 됐다. 이것이 ‘자연의 인간화’에 대립되는 ‘기계의 생체화’다.
어떤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살 것인가
아무리 자연과 생태가 중요하다 하나, 오늘날 러다이트운동(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은 불가능하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아담과 이브가 ‘선악’의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듯, 어차피 문명이 시작된 이상 인간은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어떤 테크놀로지인가?’ 하는 문제이리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디지털 시대에 4대강 사업과 같은 테크놀로지는 거대한 시대착오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좋은 예가 있다. 가령 청계천 사업과 선유도공원을 비교해보자. 청계천이 자연을 인공으로 바꾸어놓았다면, 선유도공원은 인공을 자연으로 바꾸어놓았다. 4대강과 태화강을 비교해보자. 4대강 사업이 애먼 자연에 ‘공구리’를 쳤다면, 태화강 사업은 인공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놓았다. 태화강의 부활은 4대강 사업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의 테크놀로지냐, 정보혁명의 테크놀로지냐. 기술에 대한 이 관념의 차이가 미감을 결정하기 마련이다. 가령 산업혁명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백로가 강변에 낳은 진짜 알보다 수문에 설치된 백로 알의 인공구조물을 더 아름답게 느낄 것이다. 반면 정보혁명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에게는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흉측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긴 그러고 보니 백로 알보다는 거대한 쥐똥을 닮은 것 같다.
진중권 문화평론가
내 연구실 옆방 교수님은 수중로봇을 연구하신다. 이른바 물고기형 로봇 말이다. 물속에서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유선형 운동을 하는 생체형 로봇을 만드는 건 기술적으로 도전해볼 만한 연구 주제라서, 나도 평소 흥미롭게 지켜보며 조금씩 도와드린 주제였다. 이 연구를 위해 연구실 하나에 거대한 수조를 만들고 물고기와 거북이의 대뇌에 전극을 박아가며, 생체형 로봇을 만들기 위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눈먼 연구비에 달려든 과학자들
몇 해 전엔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수중로봇 경쟁’에도 참가해 바다거북 로봇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바이오공학의 이해’라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랑을 한 적도 있다. 거북이 로봇과 물고기 로봇 동영상을 보여주며 바다 탐사 등에 활용될 ‘미래에 주목할 만한 기술’이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연구가 하루아침에 온 국민이 조롱하는 우스꽝스런 연구로 전락해버렸다. 대통령이 친히 4대강 사업과 함께 언급해주셔서.
대운하를 파서 인천에서 부산까지 강을 통해 선적을 운반하겠다는 초현실적인 발상은 정치적 농담을 넘어 ‘4대강 사업’으로 교묘히 바뀌어 ‘전 한반도의 토목공사 현장화’로 현실화됐다. 그리고 강바닥을 탐사하는 수중로봇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정부가 밝히자, 이 기술은 한순간에 웃기는 연구가 됐다(관련 분야 과학자에게 자문이라도 하시지!). 이제 겨우 지느러미 운동을 모사하는 수준의 물고기 로봇 연구를, 즉 아직 갈 길이 먼 수중로봇 연구를, 한순간에 공상과학(SF)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좌절과 자기모멸을 경험하게 됐다.
특히나 어느 국무회의 시간에 대통령이 친히 ‘로봇 물고기가 왜 이렇게 크냐?’ ‘그러면 실제 물고기들이 놀라지 않느냐?’ ‘작은 로봇 물고기들이 서로 협력해서 수중탐사를 하면 되지 않느냐?’ 같은 거친 아이디어를 던지면서, 이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더욱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돼버렸다. 로봇 물고기의 크기를 실제 로봇 수준으로 줄이는 것은 약 10년이 필요한, 현재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비현실적인 주문이다. 게다가 여러 마리의 물고기 로봇이 서로 협력해 수중탐사를 처리하는 기술은 ‘센서 네트워크’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기술 중 하나로, 아직은 요원한 테크놀로지다(대통령이 얼치기 과학 과외를 받으셨나?).
물론 그 와중에 혜택을 본 과학자들도 있다. 갑자기 너도나도 수중로봇을 연구하겠다고 달려들어 눈먼 연구비를 나눠먹은 사람도 있고, 정보기술(IT)과 생태환경 산업을 접목하겠다고 떠드는 환경공학자도 생겨났다. 원래 돈이 있는 곳에 전문가들이 몰린다고 하지만, 실상은 돈에 눈먼 전문가를 양산하는 형국이다.
“도대체 ‘4대강 사업’에서 4대강이 어딘가요?”라고 묻던 무지한 교수들이 한순간 4대강 전문가가 돼버렸다. IT 첨단 기술로 강바닥의 쓰레기를 찾고, 수질을 탐사하고, 수변 생태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과학자들이 근사한 발표 자료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연구비를 주겠다는 정치권력과 상업권력에 굴종했다.
짓밟힌 생태계 회복 가능할까
재작년에 영산강을 한번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됐다. 4대강 사업의 현장이란 곳도 둘러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 현장을 둘러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수변 생태계를 그토록 무참히 짓밟고 있는 그 끔찍한 광경에 비명이 터져나오고 탄성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4대강을 흙 한 줌도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보존해두어야 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영산강이나 낙동강은 강 자체가 이미 오랫동안 방치돼 있어서 엉망이고, 생태계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환경 조성을 해야 한다. 각별한 관리가 필요하다. 그 지역 주민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은 ‘환경’이라는 비늘을 두르기만 했을 뿐, 토목사업의 건설현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운하를 뚫고 뱃길을 만들려고 강을 헤집는 공사에 건설사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었고 지방 토호들이 간만에 중앙정부에서 들어온 돈을 흥청망청 나눠 쓰려고 혈안이 돼 있는 형국이라, 성대하게 4주년 행사를 치르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리라.
‘4대강 사업’이 비참한 이유는 이제 누군가 강을 다시 바라보자고, 강의 생태계를 위해 환경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하면, 정치적 색안경을 쓰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강 생태계 복원 사업에 대해 ‘4대강 사업 짝퉁 버전의 상상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까봐 그게 걱정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4대강은 4대강 사업 때문에 바닥까지 헤집어졌으나 원상 복구는 어려운, 강 생태계 회복의 노력은 오래전에 물 건너간 사업이 된 건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과 의사결정, 그리고 자신과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에 대한 ‘보은’이나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위해 지방 토호세력의 비위를 맞춰준 사업이 수십만 년을 버텨온 생태계를 이렇게 무참하게 대책 없이 박살내놓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걱정이 영산강을 돌아보고 오는 차 안에서 들었다. 4대강 사업과 관련된 전문가들과 관련 분야 과학기술자들이 모여 ‘4대강 사업’의 무모함을 지적하고 성명을 내보아도, 이런 식의 국책사업은 이해관계에 의해 결국 자행되고 국민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영국이나 독일 같았으면 강 하나를 개발하는 데도 수년의 계획을 세우고, 그 기간만큼 조사하고, 더 오랜 시간 공사를 진행했을텐데, 21세기에 한반도에서 벌어진 첫 대규모 국토개발 사업인 4대강 사업은 4년 동안 4개의 강을 동시에, 그것도 아무런 계획 없이, 졸속 조사 뒤에 바로 공사에 들어가, 4년 만에 완공돼버렸다. 그것이 창피한 줄 모르고, 각종 홍보 행사가 정부에 의해 자행되는 작금의 현실은 연구실 어느 바닥에서 헉헉거리고 있을 물고기 로봇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사업으로 역사에 기술될 것이다.
과학적 사실의 주관적 정치적 해석
역사가 기록할 더 비참한 상황은 ‘과학적 타당성 검증’이라는 절차가 포함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실이 얼마나 주관적이며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업이었다는 점이다. 누가 과학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절대적이라 말했던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통계 결과를 들이대고, 같은 결과를 정반대로 해석하며, 어제의 생태보호 전문가가 오늘은 토목공사 예찬론을 펼쳐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과학계는 맞이하게 됐다.
과학자들은 편을 가르고, 잇속을 따지며 싸우고, 돈을 나눠먹기 위해 정치적 장단에 맞장구를 치는 형국이 되었다. 결국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면, 이 모든 것이 ‘헛소동’이었음을 모두가 알게 될 텐데 말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바이오및뇌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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