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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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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그리고 이봉진

등록 2011-01-06 09:04 수정 2020-05-03 04:26

오늘이 12월29일, 사흘만 지나면 마흔이 된다. 30대를 꼬박 기자로 살았다. 정확히 ‘한겨레 기자’로 살았다. 한겨레 기자로 살면서 만난 이들 가운데 기억할 이름이 있다. 자꾸만 잊으니 기록해두려고 한다. 스스로 ‘회사형 히키코모리’로 부를 정도로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는다. 게으름 탓도 있지만, 누군가 만나서 괜한 말들을 쏟아내고 돌아오는 길이 헛헛해서 그렇다. 그래도 명색이 기자니 사람을 만났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자신을 낮추고 낮추던 사람

살아서 훌륭한 이들이 있다. 병역거부자 변호사로 만났던 이정희 의원은 진심의 정치인이 되었다. 초짜 기자로 2000년 만났던 홍희덕 경기도 노조(의정부 환경미화원 분회) 사무국장도 역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미화원의 파업을 다룬 기사는 를 개사한 로 시작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고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그를 만났단 사실을 기억했다. 설마 그 미화원이 그 의원이 됐으리라 생각지 못한 것이다. 지천명이 넘어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노동자 정당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0년대에 견줘 2000년대가 그나마 ‘나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이들이 의원이 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보지 못할 이들도 있다. 홍희덕 노동자를 만나고 두어 해 지났을 무렵에 허세욱 노동자를 만났다. 당시 허세욱씨는 택시운전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찾아온 그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서울 봉천동 아니면 신림동 어디쯤에 있는 회사도 찾아간 기억이 있다. 사후에 발간된 평전에도 나오지만, 그는 자신을 낮추고 낮추는 이였다. 족히 스무 살은 어렸을 “기자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심지어 회사로 찾아가는 날에는 택시를 몰고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가 절박하게 노조 민주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국 기사를 쓰지는 못했다. 나중에 회사와 생길 문제가 마음에 걸렸단 느낌만 남아 있다.

기사를 쓰지 못해도 연락이 끊기진 않았다. 두어 해 동안 아주 가끔씩 안부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아줘서 고맙단 말이나, 요즘은 민주노동당 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어쩌다 집회에서 멀찌감치 그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는 참여연대에서 만드는 잡지에 나온 그의 인터뷰도 읽었다. 거의 날이면 날마다 있는 집회에 빠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놀란단 얘기를 읽으면서, 감동도 받고 걱정도 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과 반대가 한창인 가운데, 누군가 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이름이 낯익었다. 고 허세욱 열사는 그렇게 소신공양으로 세상을 밝혔다.

기자로 만난 사람은 아닌데, 기록해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 1990년대 후반 국민승리21 지구당 사무실에서 처음 그를 보았다. 그는 퀵서비스 노동자였고,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맞은 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손에는 언제나 책이 들려 있었다. 표지만 보아도 녹록지 않은 철학책이 많았다. 당시에 어쭙잖게, 1980~90년대가 위대했다면 저런 책 읽는 노동자를 만든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끼고 살았던 노동자

2003년 겨울, 인터넷 게시판을 어슬렁거리다 사고 소식을 들었다. 다시 웹을 뒤적이니 노회찬 전 의원이 2004년에 썼던 ‘난중일기’가 남아 있다. “이봉진 향년 34세. 퀵서비스 노동자인 그는 구랍 19일 불의의 사고로 영면하였다. 10년 넘게 진보정당운동에 헌신하며 8년째 오토바이를 타고 운송노동을 하던 그는 마지막까지 사회주의자였다. 동대문지구당 당원들이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더욱 비통해한 것은 그의 삶에 민주노동당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혼이었던 그가 적금통장까지 깨면서 당을 위해 헌신한 것은 작은 일화에 불과하다….” 문득 2004년 총선을 그가 보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혼자 가는 귀갓길에 가끔 흥얼거리는 노래를 적는다.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알 것만 같아 퀭한 눈 올려다본 흐린 천장에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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