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우리의 마음은 한 해가 다 저무는 순간까지, 전쟁 공포와 안보 불안으로 오글거렸다. 모두 한켠으론 불안을 공유했지만, 그것은 마치 현 정권하를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생존 조건 같은 것이 돼버렸다. 우리 곁에 늘 도사리고 있는 불안에 사로잡혀 영혼을 갉아먹히는 대신, 사람들은 5천원짜리 ‘통큰치킨’에 흥분했고, 그것이 사라진 사실에 또 격하게 반응했다. 누군가는 아이들에 대한 무상급식에 발작적 경기를 일으키며, 가장 정당해 보이는 이 예산에서 뜻밖의 공방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보이기도 했다. (무상급식 공방에서 가장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오세훈의 히스테리다. 여기서 우린, 우파의 모범생으로, 강남 졸부들의 아이콘으로 꾸준히 진화해온 오세훈을 재발견한다.)
지붕으로 올라가버린 북한포근함이 발밑에 내려앉을 틈이 없는 이 심란한 연말, 뜻밖에도 우리에게 다가온 최후의 불안을 제거해준 건 북이었다. 지난 12월20일의 연평도 사격훈련 직후, 북한이 “그런 사소한 도발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는 의연한 멘트를 쏟아내는 순간, 이 유치하면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남북 간의 다툼에서 그들은 우월한 위치를 점해버린다. 우린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지붕 위로 올라가버린 닭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북은 외교에선 한 가지 대단히 매력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다. 잘 나가다가 중요한 대목에서 물을 엎질러버리곤 하지만, 그들의 ‘자존심’을 원칙에 둔 외교는, 언제나 최악의 순간에 그들이 발을 디딜 작은 입지를 확보해주었고, 최후의 키를 그들이 쥘 수 있게 해주었다.
죽기 전까지 솔직담백하게 적어 내려간 을 보면, 그가 평생을 몸 바쳐 심혈을 기울였던 첫 번째 작업은 남북 간의 화해였다. 그는 옥중에서 주어진 시간을 남북 화해와 통일에 이르는 길을 구상하는 데 대부분 할애한다. 햇볕정책은 정권의 싱크탱크라 불리는 몇몇 테크노크라트들, 혹은 전문가들의 머리에서 선거용 프로그램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차가운 독방에 들어앉은 한 민주투사의 방대한 연구와 평생을 통해 다져진 단단한 철학과 신념에서 나왔다. 김대중은 민주투사로, 평화주의자로 그가 다져온 세계적 지명도를 통해 그의 대북정책에 대한 주변국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하고, 김정일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의 평화를 위한 절절한 노력은 공산군과 국군이 지나갈 때마다 한 무더기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던 전쟁의 참혹한 부조리를 경험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평화야말로, 안보는 물론 경제성장과 번영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을 그는 확신하게 된다.
넬슨 만델라는 ‘평화는 최고의 무기’라는 말로, 그의 이같은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전쟁으로 평화를 지키겠다는 공언은 조지 부시가 더 할 수 없이 요란하게 헛소리임을 입증해주었다. 김대중은 국제관계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가 평생 온몸으로 보여준 진정성, 인격으로 외교를 했고, 그의 외교는 대부분의 사람을 설득했다. 이명박 정부는 연평도 포격 사건을 햇볕정책의 완벽한 실패로 해석하며, 조지 부시가 이미 써먹었다 실패한 평화를 위한 무력도발을 손끝에 쥐고 휘두른다. 철학도, 신념도, 하다못해 나이에 걸맞은 쥐꼬리만 한 연륜도 찾아볼 길 없는 ‘묻지마’ 외교안보 정책의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한 줌의 햇살이 그리운 연말
미국에 갔던 아인슈타인에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다음번 세계대전에서 활약할 무기는 무엇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이슈타인은 대답했다. “다음 전쟁에서 활약할 무기가 무엇일지는 알 수 없지요. 하지만 그 다음번 무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활과 화살입니다.” 또 다른 전쟁은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할 뿐이다. 그다음에 오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한 확인, 스스로가 파괴한 것 위에 다시 세워야 할 삶이다. 햇볕은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한다. 그리고 평화 속에서 삶은 비로소 뻗어갈 수 있다. 한 줌의 햇살, 한 모금의 평화가 절실해지는 연말이다.
목수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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