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경험의 황홀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국가가 나서서 퍼뜨린 지구화의 장밋빛 꿈이 부채, 그것도 1년 내에 상환해야 하는 악성채무로 만들어진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들통나버린 뒤, 사람들은 지구적 자본의 시간 속으로 난폭하게 빨려 들어갔다. 이제 기업 구조조정 못지않은 ‘생각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세계적 재벌기업 총수의 말대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야 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지구화 시대, 신들의 귀환
‘고스트 인 더 셸’(Ghost in the Shell).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의 영어 제목이다. 여기에선 ‘몸 없는 영혼’, 혹은 이 몸 저 몸을 옮겨다니는, 몸이라면 구석구석까지 ‘다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사건을 추동한다. 한데 지구화 시대 한국은 빠른 속도로 ‘영혼 없는 몸’의 존재에 관한 신화가 담론 권력을 획득하고 있다. 재생산에 유리한 갖가지 생각의 기술들, 그 타인의 품성들로 자기 영혼을 끊임없이 쇄신할 수 있는 자, 그이가 지구화 시대의 승자가 된다는 얘기들이 전설상의 무용담처럼 세간을 떠돌고 있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한국 사회의 개신교가 퇴조하고 있다는 것에 관해 분석한 지난번 칼럼의 이야기처럼, 개신교의 신관에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신, 그 붙박이 신이 거주했던 영혼은 청산 대상이 되고 있다. 퇴거를 명령받은 신은 존재에게 말을 걸 수 없다. 침묵하는 신, 그런 신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급속하게 변모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영혼도 초고속 변모 중이다. 하지만 이렇게 빠른 변화를 위해 영혼 속 붙박이들을 제거해야 살아남을 거라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난데없는’ 재앙을 맞닥뜨렸다. 이런 ‘무차별 리스크의 사회’에서 재앙을 겪거나 예감하는 이들은 다시 종교를 찾는다. 신들이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괴로움을 회피할 수단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종교적’이 된다. 특히 사회의 불안정성이 높아서 재앙을 예측할 수 없을 때 종교적 성향은 급상승한다. 이러한 종교적인 감성적 열정은 집단의 결속력을 극대화해 공동의 행동을 조직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 이 집단은 각자 자기 식의 해석을 열렬하게 시도하지만, 그 해석들이 소통하면서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행동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열광적인 감성적 공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지성적 소통은 없고 감성적 공조가 넘치는 현상, 그것이 바로 이 글이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것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종교적인데 마땅히 찾아갈 종교가 없다. 자기 영혼까지도 변신하는 것만이 성공의 조건이 된다는 믿음이 팽배한 사회에서, 개신교뿐 아니라 개신교 따라 하기가 지배적인 다른 종교들도 여전히 배타주의적 신을 숭배한다. 이 시대착오성 탓에 종교적인 사람들이 찾아갈 종교가 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럴 때 신앙의 대안을 향한 다양한 시도가 활발해진다.
분노의 공공적 출구, 시민종교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가 여중생 두 명을 압사시킨 사건을 규탄하는 촛불시위가 그해 11월 이후 수차례에 걸쳐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이후 ‘촛불’은 광범위한 대중시위의 의례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는 그 절정을 보여준다.
2002년 ‘깃발 논쟁’에서 발단이 된, 이른바 운동권이 주도한 시위에 대한 청산 담론은 2008년에 이르면 거의 일반화되었다. 이것은 한국 민주화운동이 남긴 저항의 인적·정신적 유산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다. 특히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과학주의적 열정, 즉 강한 지성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한데 최근의 촛불집회는 지성보다는 감성적 열정을 중심으로 통합된 집합행동이다. 무수한 해석이 나와 때로는 격렬하게 논쟁을 하고 있지만, 그 해석이 사람들을 결속시킨 것이 아니라 분노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수십만의 대중을 한데 결속시킨 그 불같은 분노는 여간해선 한정된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 암묵적으로 약속된 시간에만 분노하고 이후에는 차분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또 그 공간에서 해산할 때는 자신의 분노의 흔적들을 청소하기까지 한다. 마치 열정이 분출하는 광적인 예배를 마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일상으로 복귀하는 이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명 미군 장갑차 사건이나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같은 사안들은 분노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 계기들이다. 부조리하다고 판단하는 사안이 있다고 그것이 곧바로 집단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 단계의 장치가 필요하다. 가령 인터넷 공간에서 짧은 시간에 압축적이고 다층적으로 벌어진 강렬한 토론은 공분을 집단행동으로 점화시키는 매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사회적 사안들에 공적 분노를 표출하도록 ‘스탠바이’(stand by)된 영혼의 상태 즉, 동기화된(obilizational) 마음 상태가 있기에 더욱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해석을 얘기하자면, 이 공적 분노의 정체는 지구화 시대 그 광속의 변화가 지난 시절 영혼을 채웠던 진리들, 신들, 그 절대적인 것들을 해체해버린 것과 관련이 있다. 삶은 깊은 수렁에 빠지듯 헤어나올 수 없는 고도의 리스크 사회의 늪으로 내던져졌는데, 그 위기를 견뎌낼 논리적인 내적 자기 준거가 사라진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존재론적 위기(ontological crisis) 상황에 놓여 있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질이 지난 시대의 그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내적 해석체계의 부재가 다른 시대의 사람들보다 고통을 더 심각하게 체감하게 한다. 한데 고통은 종종 분노로 표현된다. 화를 폭발할 대상이 필요하다. 마침 그때 공적인 분노의 대상이 보인다. 개별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공분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사적인 마음 상태는 종종 공적 분노로, 그것을 행동화하는 내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감성 과잉의 예배를 닮아
내가 ‘한국의 시민종교’라고 부르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분노를 표현하는 공공적 출구를 찾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화 시대 종교의 위기에 대해 대안적 신앙을 발견하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는 종교제도들 밖,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일어난 종교 현상, 곧 시민종교라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사람들 각자의 삶은 고통에 휩싸여버렸다. 그것은 예측되지도 해석되지도 못한 채 사람들의 삶을 파멸의 위기로 내몰았다. 이 정체 모를 위기 앞에 분노가 치민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를 향해, 누구에게 분노하란 말인가? 바로 이때 사회적·국가적 스캔들이 발생했다. 시민들의 사적인 분노를 결속시키고 공적인 분노로 전이시킬 만한 사건이다.
그런데 그 전이를 해석할 확고부동한 진리 체계, 혹은 그런 신탁을 내린 절대적 신은 영영혼의 자리에서 퇴거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공적 분노를 표출해야 하지만, 하나의 진리 내용 혹은 한 분인 신의 신탁에 따라 결속할 수 없다. 무수한 해석이 서로 논쟁한다. 그런데 해석은 달라도 그들을 하나로 묶어 행동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종교적 의례가 그런 경우다. 의례는 생각을 합체시키는 데 효과적이지 않지만 행동을 공유하게 하는 감정의 합체를 낳는 장치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 촛불시위, 아니 ‘촛불의례’다.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듯 사람들은 열정적인 촛불의례에 참여함으로써 사적 분노를 공적 분노로 모으고, 집합적으로 소비할 시공간적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시민종교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면, 최근 발명된 한국의 시민종교는 지구화 시대 사람들의 영적·존재론적 혼란을 감당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내적 준거가 부재하면 더 심각하게 체감되는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사람들은 극단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령 혁명에 참여하거나 자살을 하거나. 반면 종교의례는 혁명이든 자살이든, 그런 극단적 행위를 실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수행한다. 해서 시민종교는 사람들 개개인의 분노를 충분히 담아내되 그 위험부담을 최소화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그랬던 것처럼, 감성이 과하게 넘치는 종교적인 집단적 소비는 지적인 사유를 최면시켜야만 효력을 발생시키는 신앙 양식이다. 해석이 과하게 넘치는 사회가 문제이듯 감정적 공조가 지나치면 그런 종교는 이벤트가 난무하는 사회, 성찰이 결핍된 사회로 우리를 몰아갈 수 있다. 제도종교 내에서 벌어지는 신앙의 이벤트화도 그렇지만, 제도종교 밖에서 벌어지는 시민종교적 현상도 이벤트적 감응에 더 익숙한 사람을 만든다. 최근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 여든 야든 정치 엘리트들이 경쟁하듯 이벤트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 시각적 미디어의 첨단화의 부작용이겠다. 한데 한국의 시민종교는 이런 양상을 성찰하는 시민적 능력을 강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시민종교의 미래, 지성과 감성의 통합
지적 토론은 합의의 미덕으로 이어지는 생각 나눔의 도구다. 또 감성적 공조는 포용의 미덕으로 이어지는 마음 나눔의 도구다. 해서 이 두 요소가 잘 합류한 시민종교 혹은 시민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 비전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시민종교는 그런 비전을 가로막고 있다.
지난번과 이번 글을 서론으로 하는 이 연재는 지구화 시대를 맞아 근대적 신이 퇴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신들이 도래하는 한국적 시민종교의 등장을 말하면서, 우리 사회의 성찰적 발전을 가로막는 왜곡된 종교성의 요소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런 시민종교가 형성되기까지 과거 이력을 돌아보고 현재의 양상과 추이를 살피는 글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능성의 징후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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