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온 어린 소녀가 열악한 환경에서 격무에 시달리며 돈을 모아 고향집에 보내거나 저축했다는 얘기. 동생들 학비를 대기도 하고 스스로 주경야독 고학을 하기도 했다는 수많은 사례들. 소설에서조차 후일담이라 진부하게 치부되곤 하는 그것들과 너무도 닮은 일을 며칠 전 접했다.
<font color="#00847C">헛된 희망조차 바랄 수 없는 사회</font>
‘상경’ ‘소녀 가장’ ‘생활고 비관’. 1980~90년대에 봤을 법한 단어들이 일간지를 장식했다. 미싱이 돌아가는 다락방에서, 공단의 공장에서 야간과 특근을 하며 산업역군으로 불리던 그때의 소녀들과 달리 2010년을 살던 19살 소녀는 한강에 투신했다. 경찰은 심리적 외로움과 경제적 어려움을 자살의 이유로 꼽았다. 경기도에서 조부모·동생과 함께 살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한 달에 80만원을 벌어 고시원 방세로 27만원을 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청년실업과 88만원 세대를 말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이 용어에서 그녀와 같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이들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류대다 지방대다 대학을 졸업한 이들 안에서도 줄 세우고 나뉘어져 열등감과 소외가 만연해 있지만, 어쨌든 그 또래의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대학을 나오는 세태이기 때문이다.
19살 소녀가 마지막 남긴 말은 고시원비가 밀려 힘들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였다. 보낸 상대는 가족도 선생님도 친구나 선배도 아닌, 소녀가 일하던 패밀리 레스토랑 주인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과 자살 증가율이 높기로 잘 알려진 대한민국이다. 청소년, 20대, 노인 등 세대를 막론하고 증가하는 우리나라의 자살에 대해 영국의 한 잡지는 과도한 경쟁과 양극화가 원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어떤 죽음에 대해서도 함부로 재단하거나 감히 가벼이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조심스러움 가운데서도 분명한 것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혹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을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다거나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소녀 또래의 아이들 중에는 한 달 사교육비로 80만원 정도는 어렵지 않게 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황제의 식사’를 하셨던 어떤 나으리 부류의 사람들은 월 80만원 정도 수입이면 족히 살 만한데 죽을 필요까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또 성실과 근면으로 살아온 기성세대 중에는 더 어려운 때도 견뎌왔음을 말하며 젊은이의 인내와 근성을 아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근면과 성실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비록 살아보니 그때 품었던 희망이 적중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해 헛된 희망이었다 싶은 이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당장이 아무리 힘겨워도 사람들은 내일을 보면서 그것을 충분히 이겨낸다. 현재의 힘겨움과 고난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바랄 수 있을 때 가치를 발휘한다. 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하루하루의 근면과 성실은 고된 일상이며 고통일 뿐이다. 하물며 그 고통을 영원히 이어가야 한다는 절망을 순전히 개인의 책임인 양 몰아세워서는 안 될 일이다.
<font color="#C21A8D">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의지를</font>
휘황한 야경 사이로 흐르는 한강물을 내려다보며 2010년 대한민국을 살았던 19살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홀로 열심히 살아보고자 했던 소녀에게 가파른 경제성장률과 무역흑자를 자랑하는 세상과 사회는 어떤 존재였을까. 감상적이고 부끄러운 어른은 뻐근한 가슴의 동통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신수원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황룡사 터에 멀쩡한 접시 3장 첩첩이…13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숙명여대 교수들도 “윤, 특검 수용 안 할 거면 하야하라” 시국선언 [전문]
미 대선 막 올랐다…초박빙 승패 윤곽 이르면 6일 낮 나올 수도
회견 이틀 전 “개혁 완수” 고수한 윤...김건희 문제, 인적 쇄신 어디까지
남편 몰래 해리스 찍은 여성들…폭스 뉴스 “불륜과 같아”
[단독] 국방부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북 파병으로 사이버 위협 커져”
SNL, 대통령 풍자는 잘해도…하니 흉내로 뭇매 맞는 이유
미 대선, 펜실베이니아주 9천표 실수로 ‘무효 위기’
“명태균씨 억울한 부분 있어 무료 변론 맡았다”
한양대 교수들도 시국선언 “모든 분야 반동과 퇴행…윤석열 퇴진”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