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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후추와 민주주의

등록 2010-06-02 21:01 수정 2020-05-03 04:26
통후추와 민주주의.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통후추와 민주주의.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개인이나 사회의 성숙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 하나가 다양성일 것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뿐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의 다양성을 얼마나 인정하고 존중하는가는 민주주의 실현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다원화되고 빠르게 변하는 우리 사회 개인 간의 관계에서나 일상에서도 다양함에 대한 수용은 점차 주요한 일이 되고 있다.

다양함과 선택의 피곤함

깨끗하고 편리한 시설과 그에 따른 관리가 더해져 있지만 우리가 대형마트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제품의 다종다양함 때문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다양함 속에 놓여 있다는 건 대단히 피곤한 일의 연속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비교·판단하고 선택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값을 치르고 물건을 구입하는 간단한 행위에도 의식·무의식적인 수많은 판단과 그에 따른 선택이 필요하다. 두부 한 모, 샴푸 하나를 사도 수십 가지 종류 가운데 자신의 조건에 합당한 것을 판단하고 골라야 한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가치 부여만큼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귀찮고 번잡한 몫이 따르는 셈이다.

게으르고 순발력 달리는 소비 형태를 지닌 내가 선택의 고단한 과정을 줄이는 나름의 방법은 이른바 ‘단골 되기’다. 물론 구입처가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단골손님은 아니다. 처음 한 번만 해당 품목의 제품을 모두 꼼꼼하게 비교하고 선택한 다음, 꾸준히 그 상품만을 구입하는 것이다. 이런 자구책에도 익숙할 만하면 그 상품이 없어지거나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상품의 홍수에 머리가 어지러울 때가 많다. 귀찮아서 눈 딱 감고 아무거나 살까 하다가도 먹고 쓰는 일상의 일이 정해진 방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그쯤의 수고는 아끼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러다 보면 수많은 물건 가운데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했다는 흡족함도 종종 얻게 된다. 다양한 물건이 존재하는 곳에서 누릴 수 있는 선택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런데 2주일째 허탕이다. 대형마트의 공략에도 아직까지 제법 건재한 동네 재래시장에도 없고, 슈퍼에도 없고, 없는 게 없다는 지역 이마트에도 없다. 대단한 물건도 아닌 흔한 국내 상표 오OO 통후추 한 통을 사기가 이렇게 번거롭고 어려울 줄 그야말로 예전엔 미처 몰랐다. 슈퍼에는 흔히 알고 있는 후춧가루는 있으나 같은 브랜드의 통후추는 없고, 따로 주문을 한 것도 아닌데 뒤늦게 가져다놓은 재래시장 통후추는 생산지나 유통기한 등 어떤 표기도 돼 있지 않다. 이마트에는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자사 브랜드 딱 한 종류만 버젓하게 놓여 있다. 지난번에 구입할 때 같은 장소에 놓여 있던 다양한 브랜드가 감쪽같이 전부 사라졌다. 한 가지 제품만 있으니 중량·출처·가격·성분 어떤 것도 비교 불가다. 매 끼니 먹는 것도 아닌데, 이천 얼마짜리 한 병이면 한참을 먹을 양인데 대충 사서 쓰자며 몇 번이나 후추 병을 집었다 놨다 했다. 자사 제품에 대한 위풍당당 자신감인지 싫음 말라 식의 소비자 무시인지 영 껄끄럽다. 선택이 봉쇄되고 잠식당하는 느낌의 강제가 찜찜하다. 통후추 한 병에 드는 기분이 과하다 눌러보지만 불쾌하고 상한 기분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손쉬운 선택의 결과는 획일화

현대사회는 다양함을 추구한다. 그것이 개개인의 욕구이든 자본주의의 집요한 속성이든 다양함은 필연적이다. 그 다양함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존을 지키려면 섣부른 선택이나 손쉬운 선택만을 해서는 곤란하다. 새삼 크고 작은 선택을 할 때 얼마나 온전하게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지니고 있는지 묻게 된다. 더 나은 선택을 하려면 다양함은 필수적인 전제다. 그러나 너무 손쉬운 선택만을 한다면 점점 다양성은 사라지고 획일화의 횡포와 폭력만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까짓 50g짜리 통후추 한 병에 자꾸만 복잡해지는 게 싫지만 더 나은 기준으로 설득이 될 때까지는 내가 구입하던 통후추를 고집할 생각이다. 다양함을 잃은 이마트에 민주주의는 없다.

신수원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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