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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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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늦게 닭 장난

등록 2010-06-01 20:28 수정 2020-05-03 04:26

나는 아들을 전쟁의 폐허 속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 그 참혹함 상황에 놓이게 하고 싶지 않다. 이제 겨우 8살이다. 전쟁이 정말 일어나기라도 하면, 아침에 등교하기 전 넋을 잃고 보는 EBS 도 볼 수 없고, 그 많은 장난감도 다 잃어버리게 되고, 엄마와 싸우다 숙제를 마친 끝에 먹을 수 있는 치킨은 구경조차 할 수 없고, 저녁에 목욕하며 장난칠 수도 없고,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고, 갈수록 배가 고파 울게 되고, 귀를 때리는 폭음에 놀라야 하고, 불안한 엄마·아빠 때문에 덩달아 무서워지고, 다리가 아파도 밤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고, 낯선 곳에서 엄마 품을 파고들며 지쳐 잠들지도 모르고, 엄마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포화 속에서 몸을 상할 수도 있다. 그렇다. 몸을 상할 수도 있다. 상상이 흘러 이르른 이 대목에서 몸이 부르르 떨린다. 머리카락 끝으로 전기가 흐른다.
이런 상상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란 걸 지난주 내내 확인했다. 흉흉한 소문처럼 전쟁의 불안감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빅뱅도 죽나요?”라고 물었다는 여중생의 마음속에도 아이돌에 대한 사랑만큼 진한 전쟁의 공포가 스며들고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일이 그렇게들 되고 난 뒤 분노로 떨쳐 일어나 총을 잡을 것인가. 일이 그렇게 되지 않게 미리 막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정부가 벌이는 일이란 마치 전쟁이란 대전제를 철칙으로 삼은 듯하다. 말뜻 그대로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안보에 대한 기민함은 보이지 않고, 천안함 사태를 기어이 더 큰 비극으로 몰아가려는 ‘닭 장난’(Chicken Game)에 온통 빠져 있는 모습이다.
돌이켜보자. 천안함이 침몰한 그 주말에 군 복무 중인 지인의 아들이 외박을 나왔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외박이나 휴가를 떠나던 병사들이 다시 부대로 돌아가 “정말 가도 되냐”고 물었다고 한다. 공무원에게 비상령이 떨어지고 대통령은 지하벙커에서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열던 때다. 그래도 육군 병사들은 외박·휴가를 나왔단다. 그로부터 60일이 지난 뒤 갑자기 수도권 도심 여기저기에 총을 든 군인들이 나타났다. 훈련이란다. 천안함이 침몰할 당시에는 그토록 느긋하던 군이 왜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야 뒤늦게 법석을 떠는지 모를 일이다. 안보를 위해서라면, 군이 바짝 긴장해야 했던 시점은 과연 어느 때인가. 지금의 ‘닭 장난’에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설사 진정성이 있더라도, 따져볼 일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여러 가지다. 특히나 산전수전 겪어본 최고경영자(CEO)라면 더 잘 알 것이다. 가능하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예방책을 강구하고,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정부가 보이는 모습은 마치 최고권력자가 군인 출신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응징, 보복, 타격 따위의 군사용어만 난무한다. 4800만 국민의 목숨을 맡기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처신이 많다. 수많은 아이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 내동댕이쳐지는 저 끔찍한 상상이 현실화된 뒤에야 깨달을 것인가.(는 책을 쓰기도 한 ‘리버럴’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한국 정부의 저런 처신에 적극 동조하고 나서는 걸 보자니 과거에 그에게 마음으로나마 보냈던 지지가 배신감으로 돌아온다.)
한 엄마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 그의 아이를 제 아이라고 우겼다. 임금님께 재판을 받으러 갔다. 임금님은 두 여성의 주장을 한 치도 좁힐 수 없으므로 칼로 아이를 두 동강 내 나눠가지라는 끔찍한 판결을 내렸다. 이상한 여자는 그러자고 했다.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아이를 가지라고 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혜로운 판결을 내린 임금님이 아니라, 엄마다. 아이를 빼앗길지언정 다치게 하지는 않겠다는 그 고귀한 모정이다.
그 아이의 이름을 ‘평화’라고 하면 어떨까, 빼앗길 수는 있으되 포기할 수는 없는. 평화는 추상의 일반명사가 아니다. 아직 연약한 골질과 새순처럼 부드러운 살갗과 우리 마음을 알 수 없는 미소로 몰아가는 신비함을 지닌, 저 따끈따끈한 몸뚱아리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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