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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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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대한 예의

등록 2010-04-23 13:42 수정 2020-05-03 04:26
슬픔에 대한 예의.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슬픔에 대한 예의.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근처 댐이 터져 그곳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 여럿이 쓸려 내려갔다. 생사를 알 길이 없는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떠내려간 사람들을 구하려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배를 띄우고 내 일처럼 나섰다. 하루 이틀 피 마르는 시간이 한 달이 돼가도록 실종자를 찾을 길은 없었다. 그들의 부모와 아내는 물가에 나와 앉아 목놓아 이름을 부르거나 울다가 지쳐 쓰러졌다. 거센 물살에 휩쓸린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시간이 아무런 진전 없이 흘렀다. 악천후에 깊은 물속까지 실종자를 찾아나선 마을 사람들마저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는 희생이 이어졌다.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어려울 때

나라에서는 좋은 장비와 인력을 보내주마고 많은 전언을 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실종자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사고 원인을 알려 했으나 그조차 오리무중이라는 답뿐이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망망하게 하늘과 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과 자식을 잃었다는 사실만 명료할 뿐 주검도 유품도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큰 슬픔 앞에서 차마 말을 아꼈다. 아직은 살아 있다는 기적을 믿고 바라고 있으므로 온전히 죽음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이런 때 나랏일을 보는 이들이 나서서 마치 추렴이라도 하듯 온 나라 사람에게 돈을 거뒀다. 널리 알리려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마을 마을을 돌았다.

어떤 것으로도 상대방을 위로하기 어려울 때 돈은 참으로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위로의 마음을 돈으로 건네야 한다는 게 민망할 때도 있지만 쓰임이 분명한 돈은 필요한 위로 방법이다. 이런 일에는 방법만큼 순서와 때도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인간 사회에서는 번거롭고 복잡한 수많은 형식을 갖춰 대소사를 치르는 것이다. 결혼식에 초대받는 하객이 신부보다 더 요란하고 화려하게 차리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만일 이 상식에 못 미치거나 넘치면 주책없는 짓이 된다. 아무리 슬프다 한들 객이 상주와 같이 거친 베옷을 입을 수는 없으며 상주나 망자의 가족보다 더 크게 곡을 하는 것도 우세스러운 일이다.

지난 일요일 한국방송에서는 특별생방송 를 방송했다. 주검도 없는 초상을 성대하게 치르겠다고 객이 말끔하게 상복 차려입고 곡을 하며 조의금을 받는 형국이었다. 순수하고 안타까운 측은지심으로 달려와 성금을 내는 이들의 순수한 마음조차 훼손하는 잘못된 추동이다. 앞서 실종자 가족들은 누리꾼 모금에 대해 위로의 마음만을 감사하게 받겠다는 입장을 표한 바 있다. 아무리 취지가 좋더라도 누구를 위한 성금 모으기이며 누구를 위한 영웅 칭호인지 돌아보고 신중해야 한다. 타인의 슬픔을 함께할 때에는 절차와 정도를 지키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다. 천안함 실종자 가족들은 절망 앞에서 실낱같은 기대와 체념을 쥐었다 놓았다 수없이 반복하며 입이 마르고 애간장이 녹고 있다. 아들이며 지아비이며 아버지인 젊은 실종자를 도저히 단념할 수 없는 가족보다 더 아프고 슬픈 사람은 없다.

말로 표할 수 있음은 이미 슬픔이 아닌지도

실종자를 구하려 목숨을 희생한 의인의 조문 사진을 자신의 누리집 벽에 자랑스레 걸어놓고, 진정한 영웅이니 아이들 교과서에 싣겠노라 공언하고, 구조 미담이 회자된다. 모두들 지나치게 성급하다. 경박한 위로의 행동과 걸음걸이는 날벼락을 맞고 한시 한시를 견디는 실종자 가족의 생채기를 쉽게 후비고 밟는 일이 될 수 있다.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운 행위일 때도 있다. 높은 분 말씀대로 아직은 때가 아니다. 숙연하고 조용히 당분간만이라도 차라리 침묵이 필요한 지금이다.

신수원 ‘손바닥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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