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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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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떠나게만 해달라는 아이들…



어른들의 폭력과 체벌을 다룬 <경계에 선 아이들>
선도보다 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먼저 생각해야
등록 2010-04-16 12:38 수정 2020-05-03 04:26
체벌은 공포심으로 아이들을 통제한다.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에게 오리걸음을 시키는 수도권의 한 고등학교.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체벌은 공포심으로 아이들을 통제한다.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에게 오리걸음을 시키는 수도권의 한 고등학교.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우리는 철로가 내려다보이는 나무에 밧줄을 하나 매어두었다. 그러고는 기차가 다가올 때 밧줄에 매달린 채 휙 날아가서는 기차 차창 밖에 매달려 기관사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매달려 있다가 도망쳤다.

보통은 밧줄을 타고 뛰어드는 동안 어떻게 때맞춰 도망갈지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는 대신 정신을 멍하게 비워두었다. 스위치를 끄고 기차와 우리 손에 쥔 밧줄만을 느꼈다. 그러면 그 순간은 아주 풍요로워졌다. 시간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뒤로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장 오래 버텼던 두 번은 기차에 아슬아슬하게 스치기도 했다. 하마터면 빠져나오지 못해 위험할 정도의 시간이었다.”

절망적인 놀이 ‘밧줄타고 기차 피하기’

〈경계에 선 아이들〉

〈경계에 선 아이들〉

페터 회의 소설 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인 페터는 덴마크 왕립 고아원 출신이다. 아이들은 그곳을 ‘빵부스러기 집’이라고 부른다. 제대로 된 빵 대신 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워야 하기 때문이다. 부실한 식사로 아이들은 추위를 타지만 침실은 난방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친구인 오스카 홈룸과 함께 밤에 화장실에 가서 잔다. 화장실에는 몸을 녹일 수 있는 라디에이터가 한 대 켜져 있다.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교사인 발상의 집 정원 잔디를 깎으러 가야 한다. 발상은 잔디를 깎으러 온 아이들을 데리고 자면서 성폭행한다. 페터가 도망치자 그는 고아원 안에 있는 전화 부스 안에서 페터를 성폭행하려고까지 한다. 그런 상황에서 페터와 오스카가 즐기는 놀이가 위에 나온 ‘밧줄 타고 기차 아슬아슬하게 피하기’이다. 이 아이들에게 현실은 도저히 제정신을 가지고 바라볼 수 없는 절망이기 때문에 ‘정신을 멍하게 비워두는 것’만이 도피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법은 소수자·약자를 도와야 하는 임무가 있다.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에 보호의 대상이다. 우리 법이 미성년자가 체결한 계약을 취소할 수 있게 하거나, 14살 미만의 아이들은 어떤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처벌받지 않고 19살 미만의 청소년은 처벌을 할 때 성인과 다른 취급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도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미성년자도 중한 범죄를 저지르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나라도 있지만(2005년 이전의 미국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죄를 저지를 때 18살 미만이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위에서 본 것처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엄한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들을 약자로만 취급하는 것은 문제의 한 단면만을 보는 것이다. 최근 가 보도한 기사를 보자. “영국의 열 살짜리 소년 2명이 저질렀던 유아 살인 사건이 17년 만에 다시 영국을 들끓게 하고 있다. 1993년 두 살 난 유아를 납치 살해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10살 소년(현재 27살) 2명 가운데 1명이 가석방됐다가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언론들이 엽기적인 당시 사건을 일제히 재조명하고 나섰다. …학교를 무단결석한 이들은 피해자를 2마일 이상 떨어진 철길로 데려간 뒤 벽돌과 쇠몽둥이로 때리고 눈에 페인트를 붓는 등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재판 과정에서 실신 지경에 이른 유아를 철길에 가로질러 방치해 숨지게 하는 등 엽기적인 범행 수법이 드러나면서 영국을 경악하게 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1999년 영국 사법부가 10살 피고인을 성인 법정에서 재판했다는 이유를 들어 내무장관이 이들의 수감 기간을 법원이 선고한 8년에서 15년으로 올린 것에 대해 부당하다는 결정을 했다. 30만 명 이상이 8년의 징역형이 너무 가볍다면서 탄원을 넣었지만 이들은 8년의 수감 생활을 마친 뒤 2001년 새로운 신원을 부여받은 후 조건부로 석방됐다.”

이런 뉴스를 보면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책임을 면하게 해주거나 가볍게 해주는 것이 과연 맞는지 회의가 든다. 2005년에 연방대법원이 18살 미만의 미성년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미국에서 실제로 18살이 되기 전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사형을 집행한 일이 있었던 것, 그리고 연방대법원의 재판 과정에서 버지니아주를 비롯한 몇 개의 주정부가 미성년자에 대한 사형 집행도 필요한 때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주 황당한 얘기는 아닌 것이다. 법이 아이들 문제를 다룰 때 어려워하는 것은, 아이들이 바로 이렇게 모순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해결해야 할 문제 중에 하나가 이런 아이들을 ‘선도’하겠다는 의도로 체벌이라는 수단을 사용해도 좋은지 여부다.

학생인권조례가 비난받는 사회에 아이들의 미래는 없다.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시위. 한겨레 박종식 기자

학생인권조례가 비난받는 사회에 아이들의 미래는 없다.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시위. 한겨레 박종식 기자

교정과 체벌, 끔찍한 공포

전화 부스에서 성폭행당할 뻔한 이후 페터는 빌 학교라는 곳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전학 온 첫해에 페터의 키는 25cm가 자랐고 몸무게도 17kg이 늘었다. 그 학교의 교장인 빌 선생님은 아이들을 보호하고 선도하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페터는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는다. 교사한테 맞거나 정학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빌 학교에 전학을 간 지 2년 뒤 페터는 아침에 제때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자명종을 두 개씩 맞춰놓아도 특별한 이유 없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지각을 하게 된다. 페터가 자기도 모르게 잠을 자면서 무의식적으로 학교를 피하게 된 것은 교장인 빌의 지도 방식 때문이다. 빌은 모든 학생을 체벌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선정해서 심한 폭행을 한다. 교실에 들어가 체벌 대상인 학생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다음 책상에서 나가떨어질 정도로 주먹질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본 다른 학생들의 ‘공포심’이 빌이 아이들을 선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이다. 페터의 마음속에는 그 공포심이 누적돼 결국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회피하게 된 것이다.

빌이 체벌하는 장면을 본 학생들은 두 가지 감정을 갖게 된다. 하나는 모든 일이 올바르게 잡혔다는 안도감이다. 다른 하나는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다. 학생들은 이런 말을 한다. “아니, 어느 정도 겁에 질려 있으면 처벌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자유처럼 여기게 되지.”

빌의 의도는 나름대로 선한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 ‘경계에 선 아이들’은 선도가 가능한 아이들을 의미한다. 굳이 체벌 등의 수단을 동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아이들, 반대로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바로잡을 가능성이 없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선도할 수 있는 아이들을 뽑아 잘못된 점을 고쳐주려는 것이 빌의 생각이다.

과연 체벌을 해서라도 아이들의 잘못을 교정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 올바른 것일까? 페터와 같이 밤에 화장실 라디에이터 옆에서 잠을 자고 ‘밧줄 타고 기차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를 하던 오스카는 페터를 따라 전학가는 것을 거부한다. 어느 날 페터는 새로운 학교에서 사귄 친구에게 빵부스러기 학교에 남은 오스카 홈룸의 운명에 대해 들려준다.

“홈룸은 몸을 휙 내밀었어. 평상시와 비슷했지. 때도 딱 맞았어. 하지만 그때는 밧줄이 철로 한가운데까지 갔는데도, 홈룸은 그냥 매달려 있기만 했어. 그 애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한껏 늘려서 휙 날아간 밧줄이 되돌아오는 것을 늦췄지. 하지만 결국 그 애가 매달린 밧줄이 추처럼 도로 돌아오려는 순간, 기차가 달려들었어.”

그렇다면 빌 학교로 전학을 간 페터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매에 대한 공포에 떠는 빌 학교의 학생 중에도 오스카처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빌 학교 교감인 프레드호이 선생의 아들인 악셀 프레드호이가 그런 경우였다. 악셀은 그림 보관함 속에 숨어서 면도날로 자기 혀를 자르려고 했다. 악셀이 사고를 일으킨 이후 빌 학교에 다니던 교사들의 아이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다. 자해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교장인 빌한테 맞은 예스 예센이라는 아이는 고막이 손상되는 상처를 입었다. 빌의 의도와 교육 방식의 실체를 깨달은 주인공 페터는 빌이 아이들을 때릴 때마다 기록한 장부를 찾아내 빌을 협박한다. 덴마크에서 체벌은 법으로 금지돼 있기 때문에 체벌 장부의 존재가 폭로되면 빌은 더 이상 교사로 남아 있을 수 없다. 페터의 요구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빌 학교를 떠나서 입양이 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체벌 등 아이들 문제에 대해 논쟁이 벌어질 때, 흔히 볼 수 있는 태도 중 하나는 아이들을 선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가장 우수한 아이가 있고, 그 아래에 있는 아이가 있고, 또 그 아래에 더 떨어지는 아이가 있다는 식이다. 그런 전제에서 출발하면 아이들을 ‘끌어올리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체벌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부차적 문제가 된다.

학생에겐 인권이 필요없다?
금태섭 변호사

금태섭 변호사

얼마 전 경기도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일부 언론에서 보여준 태도가 딱 그런 시각에 해당한다. 어떤 기사는 “학생‘인권’조례안(기사에서 인권이라는 두 글자에 따옴표를 쳤는데 학생이 ‘인권’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특이하다는 생각을 표시한 것 같다) …두발 자유, 자율학습 강요 금지부터 수업시간 외 결사의 자유 등 자못 비장한 내용까지 들어간 조례안을 내놨다”고 하면서 “(조례안을 찬성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기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명문고 나와놓고는 ‘자율학습? 웃기지 말라 그래’ ‘교내집회? 니 마음대로 해’ …라고 속삭이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한 시각이 체화된 것이 바로 ‘경계에 선 아이들’을 매로 선도하겠다는 빌 교장의 모습인 것이다.

아이 문제는 법이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너무나 다양한 모습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입장에서 어떤 모습은 우수하고, 어떤 모습은 열등하고, 어떤 모습은 그 중간에 있어서 선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한 기본권을 가지고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겠다는 계획에 대해 “자기들은 명문대·명문고 나와 놓고는”이라고 비난하는 시각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페터처럼 우리 사회를 떠나게 해달라고 요구해올지 모른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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