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이번호를 여는 에선 빨간 작약 꽃망울들이 앳된 표정으로 눈웃음부터 친다. 회사 정원의 나무들도 가지에 한창 물이 올랐다. 아기 살갗 같다. 성마른 놈들은 벌써 파릇파릇한 잎사귀를 내밀었다. 곧 천지가 새순으로 덮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아름답다. 자식을 낳아보기 전에는 사실 실감하지 못했다. 총각 시절 친구가 어느 해 봄에 한 신부님과 산행을 하다 들었다는 말, “이런 꽃구경을 몇 번이나 더 할 것 같아?” 같은 말도 건성으로 넘겼다. 아이가 생기고 자라다 보니 이젠 그런 말이 종종 생각난다. 그럴수록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더 예쁘게 다가온다.
이를 위해 태양과 지구는 일찍부터 공모를 한 모양이다. 공전의 시간과 자전축의 기울기를 합작해 한 해 한 차례씩 봄이라는 계절을 준비해둔 것이다. 만져보기도 조심스러운 여린 이파리들에 광자가 부딪쳐 만들어내는 말간 연둣빛, 아스라한 색깔로 천지를 덮는 보드라운 꽃잎들의 움직임, 겨울잠에서 깨어난 말랑한 피부의 생명체들, 덩달아 눈부시게 빛나는 아이들의 발간 볼…. 태양과 지구의 합작으로 어린 생명체에 대한 사랑을 꼬박꼬박 되새기게 하는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절망한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갓난아이를 굶겨 죽인 부모의 이야기는 ‘비정상’으로 치부하자. 천지사방이 아이 키우기가 버겁다는 신음 소리로 끙끙댄다. 아이를 맡길 곳도 없고, 오로지 아이를 챙기자니 가계가 엉망이 되고, 아이가 커갈수록 걱정은 태산처럼 쌓인다. 사교육비를 많이 들여야 공부를 잘한다는 한탄이 정부의 학업성취도 평가를 통해 또다시 공식화되고, 교육 관료라는 자들은 그런 결과를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발표한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교복 쿠폰을 나눠준 지역에서는 교복을 납품할 업체가 물량을 제때 맞추지 못해 교복도 입지 못한 채 입학식을 한 아이들도 있다.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 자식 네 자식 가리지 않고 학교 급식이라도 무상으로 먹이자는 제안에 이른바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무리들은 급체 증상을 보인다. 급기야 출산율이 사실상 세계 꼴찌인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출산파업’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 절망은 사실 오래된 것이다.
어린 생명의 유전을 경제적 가치로 따질 일은 아니다. 그래도 국가 경쟁력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성장주의자·개발주의자라면 그런 계산도 할 법하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지금의 출산율로는 머지않은 미래에 나라의 경쟁력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리라는 계산 말이다. 그런 계산도 못하는 대통령이나 관료라면 천치·바보요, 그런 계산을 하고도 지금처럼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는다면 더 심한 천치·바보가 아닐까.
머지않아 앞산·뒷산에 피어날 꽃들에서 이 땅에 사람의 아들·딸로 태어나지 못한 우리의 자식들 얼굴을 볼 것 같다. 애틋하고 두렵다. 둘째, 셋째, 넷째를 낳고 싶지만 차마 낳을 수 없는 부모들은 이 봄에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야 하나.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이 예쁘기만 한 봄날 오후에.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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