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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버린 여관 주인

등록 2010-03-04 11:31 수정 2020-05-03 04:26
울어버린 여관 주인.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울어버린 여관 주인.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좀 생뚱맞긴 하지만 성탄절이면 어김없이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교회 고등부에서 성탄 연극을 준비한다. 그런데 한 아이가 문제가 됐다. 착하기 그지없지만 약간 지능이 떨어져서 조금 긴 대사를 맡겼다간 고스란히 연극을 망칠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고심 끝에 그 아이에게 알맞은 배역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여관 주인’이었다. 만삭의 성모 마리아와 요셉에게 매몰차게 “방 없어요”만 외치면 되었다.

프레임에서 사라진 노인

마리아를 부둥켜안은 요셉이 애타게 여관 문을 두드렸을 때 여관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없어요!” “추위만 피할 수 있으면 됩니다.” “방 없어요!” “제발! 가진 것 다 드리겠습니다.” “방 없어요!” “마구간이라도 좋습니다. 길에서 아이를 낳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야흐로 “방 없다니까”라고 일갈한 뒤 문을 쾅 닫으면 되는 판인데, 갑자기 여관 주인의 대사가 끊겼다. 한참 동안 요셉을 바라보던 여관 주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울음이 듬뿍 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빈방 있어요. 들어와요. 후울쩍.”

음력 12월25일도 여러 날 전에 보낸 마당에 때 아닌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뜻은, 연극을 망쳤으되 그 어떤 공연보다도 더 크고 값진 감동을 선사했던 ‘여관 주인’과 얼핏 겹쳐지는 후배 PD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몇 달 전 녀석은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는 할머니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집에서 재워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걸로 알아라”는 며느리의 호령에 아파트 놀이터를 전전하기 일쑤였던 나이 89살의 할머니는 심하게 다리를 절었다. 후배 PD의 임무는 이 할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시청자의 감정을 움직일 만큼의 참담한 모습을 영상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즉,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든 카메라의 뷰파인더 안에 할머니의 모습을 잡아두어야 할 임무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할머니가 체력이 다해 주저앉아버렸을 때 그는 할머니에게 다가섰다. “힘들어 보이시는데 제가 도와드릴까요?”

적절한 개입이다. 부축해드리면서 “왜 가만히 보고 있느냐?”는 시청자의 힐난을 모면하되, 할머니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애석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임무이고, 특히 카메라를 들고 바싹 접근한 그가 수행해야 할 지상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배가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제가 업어서 모셔다 드릴까요?”

나는 다른 PD가 그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줄 알았다. 든든한 제작진이 할머니를 업고 발걸음을 옮기는 아름다운 그림이 등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없었다. ‘끙차’ 소리와 함께 할머니는 후배가 들고 있던 카메라의 프레임에서 사라졌다. 할머니의 지팡이가 후배의 다리 앞에서 덜렁거렸고 후배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땅바닥을 두들길 뿐이었다. 어느새 녀석은 촬영 따위 걷어치우고 할머니를 업어드리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이후 내가 상황을 캐물었을 때 녀석은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제 할머니 같아서요. 그냥 이 그림 못 쓴다고 생각하고….”

‘못 쓴다’ 했지만 최고로 아름다운 화면

피사체를 외면한 카메라에 무슨 가치가 있으랴. 그러나 녀석이 “못 쓴다”고 여긴 그림은 여과 없이 방송을 탔다. 투덕투덕 로봇처럼 움직이던 녀석의 둔중한 다리는 세상없는 카메라 감독이 촬영한 영상보다 아름다웠고, 맥없이 흔들리던 할머니의 지팡이만큼 할머니의 애처로움을 잘 드러내는 그림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으며, 못내 미안했던 할머니가 내려달라고 하자 “아니에요, 끝까지 모셔다 드릴게요”라고 되받던 그의 오디오는 어떤 성우의 내레이션보다 차지고 매끄럽게 귀에 와닿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프로그램 역사를 통틀어 손꼽힐 만한 명장면을 뽑아냈다. 눈앞에서 울먹이는 요셉을 긍휼히 여긴 나머지 깜박 처지를 망각해버린 어느 소년의 따뜻한 실수처럼, 잘난 체하며 후배들의 카메라 앵글을 시비하던 선배와 지켜보는 시청자 모두에게 사소하지만은 않은 감동과 뿌듯함을 선사해주었던 것이다.

김형민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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