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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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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벅지

등록 2010-02-24 15:44 수정 2020-05-03 04:26

인체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다른 답이 나올 게 분명하다.
그래도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밴쿠버 겨울올림픽 때문이다. 미끄러운 눈과 얼음 위에서, 굳은 땅보다 믿음이 덜 가는 그 그라운드에서, 온몸의 근육을 총동원해가며(특히 허벅지가 두드러진다) 0.001초의 다툼을 벌이는 선수들 때문이다. 오기든, 인생역전이든, 자존심이든, 그 무엇이 추동했든, 몸에 달라붙는 유니폼에 비친 선수들의 땀 흘린 몸은 아름다우니까. 그런 와중에 또 하나의 유행어가 생겨났다. ‘철벅지.’ 지난해 ‘꿀벅지’라는, 차마 기록하고 싶지 않은 조어가 유행한 뒤끝이라 그런지, 당기고 밀치는 묘한 자성이 있는 단어다. 역시 언론의 조어 능력은 탁월하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저 두 조어 사이에서 느껴지는 대립의 기운이 생각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주류 광고에 나오는 여성의 몸매와 에드가르 드가의 이 보여주는 여성의 몸매 사이에서 도출되는 모순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성의 상품화로 비치는 극단적인 섹슈얼리티의 과시와, 무심하게 꾹꾹 눌러 다림질하는 여성의 튼실한 팔뚝과 그 옆에서 하늘을 향해 길게 하품하는 여인의 무구한 표정이 드러내는 투명한 아름다움. 그 두 가지가 서로 부닥치면서 또 한 편으로는 화해하면서 일궈내는 미감의 차이 또는 동일성에, 물음표는 곡괭이가 되어 머릿속을 파고 또 파고든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또한 지역에 따라 다양했다고 한다. 원시·고대 인류가 남긴 그림이나 조각 따위를 보면 살진 유방과 복부와 엉덩이를 자랑하는 여성이 미의 원형이었음이 드러나고, 육체 노동이 필요 없던 중세 귀족 계층에서는 파리한 몰골에 가녀린 수족의 여인이 전형적 미인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한때 중국에서는 발의 발육을 억지로 막는 전족이 미의 기준이었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에 보면, “초나라 영왕이 허리가 가냘픈 것을 좋아하여 궁중에 굶어죽는 자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한다. 궁인들도 조정 대신들도 가는 허리를 만들기 위해 허기를 견디다보니 그랬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관은 절대적일 수 없음에도, 시대가 바뀌거나 장소를 이동하면 손쉽게 전복되는 가치관임에도, 한 시대 한 장소를 지배하는 가치관은 대개 하나였다. 그렇게 어느 시대·장소에서나 그때 그곳을 지배하는 천편일률적인 기준이 있다는 게 문제다. 지금은 그런 경향이 특히 심각한 것 같다. 마치 거푸집에서 찍어낸 듯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대중매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연예인이 아니어도 비슷한 미의 잣대로 자기와 남을 평가한다. 그리고 그 잣대는, 말하자면 ‘철벅지’보다는 ‘꿀벅지’ 쪽을 향하고 있다.

이런 획일화 현상은 우리의 미감만 정복한 게 아니다. 입신출세하는 인간형의 프로토타입이 정해져 있고, 학생들도 취업에 유리한 비슷비슷한 스펙을 열심히 쌓아야만 취직 전선에 뛰어들 수 있다. 이번호 특집 기사에서 보이듯 새로 임용되는 판검사의 프로필이 어딘가로 수렴되는 현상도 맥락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답답함을 풀기 위해 우리의 미감부터 풀어주면 어떨까. 누구나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르다. ‘꿀벅지’도 아름답고 ‘철벅지’도 아름답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누구는 ‘예쁜 척’에 목매고 누구는 ‘예쁜 척’을 아예 시도하지도 않는 상황은 부자연스럽다. 자연의 생태계가 아름다운 것도 진화를 통해 너무도 다종다기한 생명체가 각기 자신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그런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면 어쩌겠는가. 모든 사람은 모든 꽃보다 아름다우며 모든 열매보다 값지다는 그 경지. 인체의 아름다움, 그리고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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