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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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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국가적 범죄가 몇몇 개인의 처벌로 정리될 수 있을까
등록 2010-01-14 15:38 수정 2020-05-03 04:25

1980년대 대학 시절 ‘금서’라는 말은 지금의 국방부 지정 ‘불온서적’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고작 수십 종에 지나지 않는 현재의 불온서적과 비교할 때 수백~수천 권에 이르는 금서의 범위도 그랬지만, 아침 등굣길에 압수수색영장은커녕 양해조차 구하지 않고 학생들의 가방을 뒤져 조금이라도 ‘냄새’가 나는 책이 나오면 끌고 가던 그 폭력성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은 난독증을 숨기기 위해 ‘별 생각 없이’ 나치에 들어가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하며 아우슈비츠로 보낼 유대인들을 선별하는 일을 했다. 그가 인류 최악의 엄청난 범죄에 동참한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그를 처벌하는 게 문제 해결의 전부일까? 로이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은 난독증을 숨기기 위해 ‘별 생각 없이’ 나치에 들어가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하며 아우슈비츠로 보낼 유대인들을 선별하는 일을 했다. 그가 인류 최악의 엄청난 범죄에 동참한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그를 처벌하는 게 문제 해결의 전부일까? 로이터

아우슈비츠 포로감시원인 여자주인공

기초적인 사회과학 서적이나 역사책조차 조심스럽게 숨겨야 했으니 마르크스의 같은 책을 갖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회과학도로서 한 번쯤은 읽어야 하는(어려워서 읽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놓고 읽은 척이라도 해야 하는) 책임에도 실제로 제대로 된 번역본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의 일이다.

그 당시 금서를 지정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전혀 불온하지 않은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왜 히틀러의 은 금서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순진한 국민이 좌익 폭력 세력에 의해 의식화되지 않도록 을 읽지 못하게 한 것이라면, 그보다 결코 폭력성이 덜하지 않은 극우 세력의 경전 도 금지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히틀러가 지은 책이 버젓이 책장에 꽂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금서 목록을 만드시는 분들을 만나보지 못해서 직접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만일 그런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 일반 국민을 대신해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는 그분들께서는 답답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죄를 저지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나, 누가 을 읽고 파시스트가 되겠다고 나서겠나, 그건 절대 안전한 책이야.”

그렇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 혹은 범죄 집단이 누구냐고 묻는 투표를 한다면 히틀러와 나치가 단연 1위를 차지할 것이다. 동서 냉전의 쌍방, 테러 국가로 서로 지탄을 주고받는 나라들에 대해서도 각각의 입장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주범에 대해서는, 지극히 정당한 일이지만,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는 데 이론을 찾기 어렵다. 다수의 아이들이 포함된 600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단순히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참혹하게 학살한 사람들에게 어떤 변명이 가능하겠는가.

그런 범인 중 한 사람이, 변명이라기보다는 진짜 궁금해서 묻는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재판장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 책이 있다. 바로 독일의 법학교수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다.

주인공인 책의 화자는 15살의 학생 시절 자신보다 21살이 많은 36살의 한나 슈미츠라는 여자를 만나 일종의 애인 관계가 된다. 두 사람은 전차 차장으로 일하는 한나의 근무시간이 끝나면 만나서 섹스를 한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한나는 주인공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책 읽기와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기’가 이 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와 에서 시작된 책 읽기가 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한나가 직장에서 승진을 권유받은 다음날, 그녀는 말없이 그 도시를 떠난다.

몇 년이 흐른 뒤 주인공이 한나를 다시 만난 곳은 법정이었다. 법과대학에 진학한 주인공은 나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연구하는 세미나에 참여하고, 마침 이웃 도시에서 열린 강제수용소 감시원들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게 된다. 그런데 그곳 피고인석에 다른 감시원들과 함께 구속된 상태로 한나가 나타난다. 그녀는 나치 정권하에서 강제수용소 감시원이었던 것이다.

8년 만에 법정에서 조우한 남녀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나치 정권 시절, 베를린에 있는 지멘스에서 일하던 한나는 근무조장 자리를 제안받았음에도 나치 친위대에 들어간다. 친위대에서 그녀가 저지른 죄로 기소된 내용은 대략 두 가지다. 첫째는 가스실에 보낼 사람을 선별했다는 것이다. 한나는 아우슈비츠의 외곽에 있는 작은 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했다. 매달 아우슈비츠에서는 60명의 여성이 그곳으로 보내졌다. 새로운 수용자를 받으면 기존에 있던 사람들 중 그에 맞먹는 수의 사람들을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가야 했다. 한나는 이 선별작업을 했다.

두 번째 기소 내용은 패전이 임박했을 때 수용자들을 호송하던 중 불에 타 죽게 했다는 것이다. 경비대와 여자 감시원들은 수감자 수백 명을 마을의 교회에 감금하고 문을 잠가놓았다. 그곳에 연합군 폭격기의 폭탄이 떨어져 불이 붙었다. 한나를 비롯한 감시원들이 문만 열어주었다면 수감자들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교회 안에 갇혀 있던 여자들은 단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범죄를 바라보는 독일 법학도들의 시각은 단호하다. “유죄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또 천태만상의 강제수용소 감시원들과 앞잡이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확실했다. 그들을 이용했거나, 그들의 행위를 막지 못했거나, 1945년 이후 그들을 추방할 수 있었음에도 추방하지 못한 세대가 법정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혐의를 조사했고, 밝은 태양 아래 재판을 받도록 했으며, 그 세대에게 수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독일인은 나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법과대학을 다니는 젊은 세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재판을 방청하는 학생 중에는 독일 국방군 장교를 아버지로 둔 사람도 있다. 무장친위대 장교의 아들도 있고 제국 내무부에서 고위 관리를 지낸 사람의 조카도 있다. 세미나에 참여하지 않는 대부분의 학생은 재판에 관심이 없다.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직접적 반감을 표시하는 학생들마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재판장이 한나에게 단지 수용소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냈느냐고 야단치듯 묻자 그녀는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단순히 난독증 숨기기 위해서였지만

한나의 반문은 나름의 개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를 청산해야, 혹은 진작에 청산했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을 때마다 흔히 나타나는 “36년간 계속된 일제 치하에서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을 어찌 단죄할 수 있겠느냐” “너라면 친일 안 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 등의 궤변과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읽고 쓸 능력이 없는 난독증이 있었던 것이다. 지멘스에서 근무조장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거절하고 친위대에 들어간 것도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전차 차장으로 일하다가 승진을 권유받고 애인 곁을 떠난 것도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실이 드러날까봐 겁을 냈기 때문이다.

재판이 끝나갈 무렵 보고서 하나가 논란이 된다. 누구라도 그 보고서를 쓴 사람으로 밝혀지면 주모자로 인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피고인들은 한나를 작성자로 지목한다. 처음에 보고서를 쓴 일이 없다고 부인하던 한나는 검사가 필적감정을 요청하자 자신이 작성했다고 인정한다. 역시 난독증을 숨기려는 시도였다. 결국 다른 피고인들은 유기징역형을 받지만 한나 슈미츠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난독증이 있었든, 사회적 상황이 어떠했든 쉽게 살릴 수도 있었던 수백 명의 사람을 처참하게 죽게 한 죄는 용납할 수 없다. 수용소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매달 60명씩 가스실로 보낸 일도 용서받을 수 없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한나의 질문에 재판장은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간단하게 응해서는 안 되고, 또 목숨이 걸리지 않은 것이라면, 그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주인공은 이 답변을 졸렬하고 궁색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이와 다른 대답을 할 수는 없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우리가 한나 슈미츠라는 개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릴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을 수 있을까. 한나는 18년을 복역한 뒤 사면을 받는다. 마침내 석방을 앞둔 새벽 그녀는 목을 매서 자살한다. 혹시 우리가 한나에게 기대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의 책임, 죄책감, 불편함을 안고 사라져주기를 원한 것 아니었을까. 사회 전체가 저지른 일을 몇몇 개인에게 환원시키고 잊어버리려고 한 것은 아닐까. 노년이 된 주인공은 이렇게 반문한다.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고 이미 당시부터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질문이 있다. 우리 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 된다. …우리는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면서 침묵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내가 세미나에서 보였던 탐사와 진상 규명의 열정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쉽게 식어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판결을 받고 형을 살고, 제2세대인 우리는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가?”

처벌받은 개인 뒤로 숨으려는 건 아닌가

한나 슈미트는 어떤 의미에서 보더라도 유죄다. 그녀가 느꼈던 모순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수백 명의 목숨과 경중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몇몇 사람’을 처벌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할 수는 없다. 기계적으로 수용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한나나, 똑같은 일을 하고도 한나를 주모자로 지목하는 동료 수용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진정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한나의 질문에 우리가 쉽게 답을 줄 수 있을까. 몇몇 사람의 판결과 처벌은커녕 친일인명사전의 발간마저도 온갖 비난을 받는 사회에서 ‘제2세대’인 우리는 정말 할 일을 다한다고 할 수 있을까.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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