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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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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질개선’은 허용돼야 하는가


언니 치료를 위해 태어난 안나를 통해 유전공학의 법·윤리 한계를 묻는 소설,
조디 피콜트의 <마이 시스터즈 키퍼…>
등록 2009-12-04 14:44 수정 2020-05-03 04:25
〈마이 시스터즈 키퍼, 쌍둥이별〉

〈마이 시스터즈 키퍼, 쌍둥이별〉

유전공학의 발달은 법과 윤리의 영역에서도 전에는 상상에만 머무르던 문제를 현실 세계로 끌어낸다.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단계의 문턱까지 다다른 것 중 하나는 ‘디자이너 베이비’를 둘러싼 논쟁이다. 한때 유전질환의 치료에 기여할 것으로 여겨졌던 기술이 이제 아이의 특징을 선택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최고의 것을 물려주고 싶은 부모 마음

디자이너 베이비를 만들어내는 기술은 착상 전 유전자 진단법(PGD·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이다. 배아가 가진 특성을 검사해 그중 선택된 것을 자궁에 착상시키는 것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아이의 성별을 선택하는 시술은 수천 건 행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월에는 1970년대 시험관아기 연구의 권위자였던 제프 스타인버그가 이끄는 의료기관에서 ‘아이의 머리카락과 눈 색깔을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해 큰 논란이 벌어졌었다(거센 반대 여론에 못 이겨 결국 한 달 만에 포기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부모가 아이의 특성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상당수 국가는 법으로 이러한 시술을 금지하고 있다. 유전적 결함을 가진 남녀가 건강한 아이를 갖고 싶어할 때 의학이 도움을 주는 정도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성별을 선택하는 것도 허용해야 할까? 외모는 어떨까? 자식이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갖기 바라는 것은 많은 부모의 공통된 희망일 것이다. 좀더 나아가 쌍꺼풀을 갖고 태어나게 하는 것은 괜찮을까? 작은 얼굴이나 긴 팔다리를 갖는 것은 허용할 수 있을까? 요즘 유행한다는 앞트임, 뒤트임을 처음부터 갖게 하는 것은 괜찮은가?

비단 외모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기억력이 뛰어난 유전자나 높은 지능을 가진 유전자를 장착한 배아를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할까? 지능이 아닌 성격은 어떨까? 자상한 성격을 가진 아이를 원하는 것은 괜찮을까? 만일 그렇다면 애국심에 불타는 부모가 ‘두려움을 모르는 군인형 인간’을 낳고 싶어할 때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완벽한 아이’를 향한 시도에 반대하는 논리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품질개선이 가능한 상품으로 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능력 있는 부모의 아이들은 날 때부터 성공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태어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경멸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다. ‘우월한 인종의 출현’ ‘초인(Super Human)의 탄생’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태어나는 아이의 인권도 중요한 쟁점이 된다. 유전과학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어서 어떤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아무리 많은 횟수의 동물실험을 거치고 검증에 검증을 거듭하더라도 아이가 자란 뒤에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완벽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들이 일반화되면 인류의 유전자풀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질병이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기 위해 과학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품질개선’을 위한 행위는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다수의 의견이 모아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한 장면. 백혈병에 걸린 언니를 치료하기 위해 태어난 안나는 부모를 상대로 신장이식을 강요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한 장면. 백혈병에 걸린 언니를 치료하기 위해 태어난 안나는 부모를 상대로 신장이식을 강요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자식에게 능력이 닿는 한 최고의 것을 물려주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에 법이 관여할 권리가 있을까? 평생 작은 키가 콤플렉스던 사람이 자식만은 큰 키를 갖고 태어나 놀림받지 않기를 바라는 게 잘못된 것일까? TV에 출연한 한 여대생이 키가 180cm가 안 되는 남자는 ‘루저’라고 해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물론 키나 용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게 자식의 키를 선택할 능력이 있다면 그런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전투형·순종형 인간’을 생산한다면

대머리는 어떨까? 유전공학의 안전성이 입증될 수 있다면, 대머리 만드는 유전자를 갖지 않은 배아를 선택하고 싶은 부모에게 안 된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대머리를 갖지 않는 것 정도는 허용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왕이면 윤기 있고 건강한 모발을 갖게 하는 것이 왜 안 된다는 말일까? 극히 일부의 주장이지만 유전공학이 발달하면 태어나는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유전적 결함을 제거하고 훌륭한 특성을 물려주는 것을 법이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것은 이런 면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베이비의 문제는 어쨌거나 태어나는 아이에게 최고의 혜택을 물려줘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만일 다른 사람을 위해 ‘맞춤제작’되는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물론 인간을 완전히 수단으로 봐서 ‘전투형 인간’을 만든다거나 ‘순종적인 인간’을 생산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금지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면 어떨까?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둔 부모가 조직 이식이 가능한 아이를 낳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이용하는 것은 허용될까?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도 크게 위험한 일이 아니라면 아직 스스로 의사표현할 수 없는 신생아 단계에서 혈액채취나 골수이식 등을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만일 아이가 자라면서 반대를 하면 어떻게 될까? 몸에 대한 결정권은 부모가 아닌 자신에게 있는데 형제자매를 돕기 싫다고 한다면 법은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까? 조디 피콜트의 소설 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변호사로 일하던 사라는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다. 소방관으로 일하는 남편 브라이언과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꾸던 그녀의 인생은 두 살 된 딸 케이트가 전골수구백혈병에 걸리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의사는 케이트에게 골수 공여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라 부부나 케이트의 오빠는 항원이 일치하지 않아서 공여를 할 수 없었고, 골수은행만 바라보고 있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사라 부부는 케이트의 이상적인 공여자가 될 수 있는 배아를 선택해서 체외수정을 통해 착상한다. 언니를 위한 존재, ‘마이 시스터즈 키퍼’(My Sister’s Keeper)인 안나가 탄생한 것이다.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뭐든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 이것이 곧 다른 아이의 권리를 침해한다 해도? 서울대 수의과대학 연구실에서 연구원들이 난소 추출작업을 벌이고 있다. 작은 사진은 8개의 복제배아 모습. 사진공동취재단·AFP연합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뭐든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 이것이 곧 다른 아이의 권리를 침해한다 해도? 서울대 수의과대학 연구실에서 연구원들이 난소 추출작업을 벌이고 있다. 작은 사진은 8개의 복제배아 모습. 사진공동취재단·AFP연합

부모를 상대로 낸 ‘신장이식 반대소송’

안나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언니에게 제대혈을 제공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팔꿈치 안쪽에서 피를 뽑아서 림프구를 채취했고, 수차례 똑같은 시술을 받아야 했다. 1년 뒤에는 케이트가 감염과 싸울 수 있도록 과립구를 기증했다. 골수를 채취할 때는 전신마취를 하고 엉덩이뼈에 바늘을 찔러야 했다. 백혈병 환자인 케이트는 끊임없는 병의 재발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무엇보다 부모를 견디기 어렵게 하는 것은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케이트가 병원 갈 때는 안나도 같이 가야 한다.

안나는 아픈 언니를 동정하고 사랑하지만, 부모님이 항상 케이트에게만 매달리고 자신의 희생은 당연한 듯이 여기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다. 오랜 기간 고대했던 하키 캠프에 못 가게 되었을 때는 “언제쯤 언니에 대한 의무에서 풀려날 수 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케이트의 병은 다시 악화되고 의사는 신장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장을 이식한다고 해서 반드시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신장이식을 하지 않으면 며칠 안에 신부전으로 사망하게 된다. 당연히 사라 부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안나의 신장을 케이트에게 이식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나는 이번에는 협조하지 않는다. 이제 13살이 된 안나는 그동안 모은 137달러87센트를 들고 변호사를 찾는다. 부모가 신장이식을 강요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소설은 물론 의료윤리나 신체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법률 이론을 묻기 위해 만든 단순한 케이스 문제가 아니다. 불치병을 앓는 딸을 가진 부모의 고뇌, 자녀들 사이의 갈등,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안나가 신장이식을 거부하게 되는 사연도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언니를 위해서 태어난 ‘맞춤 아이’ 안나의 운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지는, 디자이너 베이비가 현실이 된 이 시대의 법학이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하는 문제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안나와 같은 존재를 만드는 게 허용되는 것일까? 신장이식은커녕 피 한 방울이라도 본인의 동의 없이 채취하는 게 과연 부모의 권리에 속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과학이 치료의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법이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또 올바른 일일까?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결함 있는 생명’이란 없다

법과대학에서 불법행위와 손해배상책임에 대해 배울 때 만나게 되는 문제 중에 ‘결함 있는 생명으로 인한 소송’(wrongful life lawsuit)이라는 것이 있다. 제약회사의 잘못으로 약을 복용한 임신부가 장애아를 낳거나, 태아의 장애를 발견하지 못한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 장애아를 낳은 경우 ‘결함 있는 생명’이라는 손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제기하는 소송이다. 당연히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소송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함 있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건 나쁘건, 키가 크건 작건, 성격이 착하건 포악하건, 장애가 있건 없건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건에서 치료비를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남들보다 못한 존재’라는 이유로 배상을 받을 수는 없다.

디자이너 베이비, 치료를 위해 태어나는 아이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과학의 발달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윤리적 딜레마를 가져온다. 양쪽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고 구체적인 사건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원칙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불치병을 앓는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해서 생명을 연장할 수는 없다. 안나의 사건이 어느 나라 법원에 가더라도 승소해야 하는 것은 이런 원리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의 특징을 다양성이 아닌 ‘품질’로 생각해서 개량이 가능하다고 여기거나, 생명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인류는 유전공학의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에 의해 괴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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