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유도리’(여유를 뜻하는 일본말. 융통성이란 우리말 대신 유도리 있게 유도리를 쓰기도 한다)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는 ‘헌 법’에 위헌 결정을 내리며, 유도리 있게 ‘기지만 아니다’의 ‘새 법’을 높이 새긴 거예요. 지난 7월 언론 관련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된 과정은 위법하지만, 법안은 유효하다는 유도리 있는 결정을 지난 10월29일 내린 덕분입니다. 뭔 말이냐고요? 법안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의 심의·표결권은 침해됐지만, 그렇게 통과된 법안의 효력정지를 요구한 가처분 신청은 기각한다는 거죠. 뭔 말이냐뇨? 대리투표에 일사부재의까지 무시하며 집권당이 유도리 있게 날치기는 했지만, 법안은 유도리 있게 유효하다는 말이라니까요. 아직도요? 합법적 절차는 생깠지만, 불법적 결과는 쌩쌩. 그렇니까, 도둑질은 불법이지만 장물은 합법이란 거고, 독은 탔지만 독약은 아니고, 똥은 쌌지만 똥물은 아니란 얘기고, “위조지폐임이 분명하나 화폐로서의 효력은 없다 할 수 없다”(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말이고, ‘돌발’도 무시하고 S자도 탈선해 80점이 안 됐지만 운전면허 기능시험은 합격이란 말이고,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불법이지만 합법이다, 뭐 이런 말이 되겠어요. 말이 너무 심하지 않냐고요? 괜찮아요. 헌법재판소는 죄는 미워하지만 벌은 내리지 않아요. 유도리 정신이죠. 비아냥은 댔지만 명예훼손으로 보진 않는 거죠.
공정택 전 서울시교육감만 서운하게 됐어요. 지난해 교육감 선거 때 부인이 따로 관리하던 4억원가량을 재산을 신고하지 않아 대법원이 벌금 150만원을 선고한 거죠. 유도리 정신, 대법원에 너무 부족한 거 아닌가요. 돈을 일부러 숨겼지만 고의 누락은 아니다, 가능하잖아요. 공 전 교육감은 바로 퇴임식을 갖고 “임기를 마치지 못해 송구스럽고 서울 교육에 누를 끼친 점을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힘내세요. 11월12일 수능시험 보는 고3들, 커닝은 했지만 성적은 인정하라, 그리 할까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요, 서울 교육 너무 걱정 말아요, 그들은 다르니까요.
용산 참사 주요 농성자들에게도 징역 5~6년이 선고됐어요. 서울중앙지법은 “농성자들이 망루 내부로 진입한 경찰특공대원들에게 불붙은 화염병을 던져 화재가 발생해 망루 전체로 확대됐다”고 판단했어요. 검찰 쪽 주장만 유도리 있게 ‘인용’했다네요. 그러면서 “설령 농성자 중 누가 던졌는지 알 수 없다고 해도 망루 안에 다량의 인화물질이 있었고 화재 가능성과 상해를 입을 가능성이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농성자들이) 망루 4층에 남아 있었던 이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도 말했지요. 이게 바로 유도리 정신이라니까요. 한마디로 하자면 “농성자 중 누가 던졌는지는 모르지만, 농성자가 화염병을 던진 것”이니까요.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아, 남아있는 저흰 너무 걱정 마세요. 겨울로 가는 길목, 세상을 따뜻하게 해주는 목도리, 아니 유도리가 있으니까요.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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