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던 초겨울 어느 날, P는 통일민주당 당사 앞에 있었다. 대학생 50여 명이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한반도를 감싼 대기는 한껏 부풀어 마치 휘발유라도 섞여 있는 양 폭발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후보로 나섰다. 백기완도 가세했다. 저 치 떨리는 독재에 선거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불온한 공기를 타고 젊은이들의 가슴으로 전염됐다. 캠퍼스에선 논쟁이 뜨거웠다. 민주화 세력인 YS와 DJ가 후보를 단일화해야 한다. 후보단일화론, 이른바 ‘후단’이었다. 한계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더 개혁적인 DJ로 후보를 단일화해야 한다. 비판적 지지론, 이른바 ‘비지’였다. 무슨 말이냐, 민중 후보 백기완을 밀어야 한다. 민중후보론이었다. 그중 ‘후단’ 계열의 대학생들은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으로 향했다. 단일화 촉구 농성을 벌였다. 농성장에선 누군가 분신을 결심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그만큼 절박했다.
DJ라는 사람이 처음 P의 뇌리에 와 박힌 건 그 시절이었다. 지겹게 반복한 ‘후단’과 ‘비지’ 논쟁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끝내 서로 양보하지 않은 그들, 좀더 크게는 DJ에 서운했다. 독재를 종식하기는커녕 군인 출신 대통령에게 ‘직선’이란 이름만 달아준 선거 결과에 P의 소주잔은 하염없이 비어갔다.
그로부터 10년 뒤 DJ는 대통령이 됐다. P는 정치부 기자로 대통령 선거를 취재했다. 하지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담당했던지라, DJ와는 어떤 식사 자리에서 먼발치에 떨어져 밥을 먹은 게 인연의 전부였다.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에 흥분했던 건 사실이지만, DJ 개인에게 축하의 마음까지 건네는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해 대통령 선거 뒤 서울 수유리 4·19 묘역에 보랏빛 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P는 달떴다. 이곳을 찾은 DJ를 맞이하기 위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소속 어머니들이 저마다 머리에 보라색 스카프를 두르고 나와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머니들도 소녀처럼 들뜬 박수를 쳤다. 그들의 눈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아들·딸들이 다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보라색 물결이 이후로도 사라지지 않고 매주 양심수 석방을 위한 목요집회가 이어지는 것을 보며 또 DJ에 서운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또 한 차례 DJ가 P의 뇌리에 박힌 것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였다. DJ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포옹하는 장면, 전 정권에서 파탄시킨 한반도 평화를 복원하는 그 큰 발걸음을 지켜볼 때, ‘후단’과 ‘비지’의 쓰린 기억을 떠올리며 P는 무언가 빚진 자처럼 엷게 웃었다.
또 한 번 강산이 바뀐 2009년 여름, 병상에 누운 DJ를 본다. 정치적 셈이나 역사적 평가라는 이성의 작용으로만 뇌리 속에 끌어들였던 그를, P는 고백하건대, 처음으로 마음속에 받아들인다. 그가 쓰러지기 직전에 보인 용맹함 때문이리라.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시대,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다시 거리에 나서 사자후를 토하고 뜨거운 눈물을 쏟던 DJ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는 쓰러진 DJ를 보며 P는 생각한다. 나는 대학생 시절 저만큼 뜨거웠나. 지금 저만큼 용맹한가. 먼 훗날 육신의 힘이 다해갈 즈음 저만큼 굳셀 수 있겠나. P는 세월이 완성해가는 한 인물의 온전한 형상을 목도하며, 이 거인의 쾌유를 참마음으로 빌고 있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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