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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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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과 커피

등록 2009-07-30 16:06 수정 2020-05-03 04:25
칡과 커피.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칡과 커피.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아버지의 전근을 따라 입학했던 초등학교는 산속 작은 학교였다. 조그마한 학생들이 걸어서 등교했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오기도 했고, 산속에 나 있는 작은 길들을 헤치고 오기도 했다. 엄청나게 먼 길을 걸어서 오는 친구도 있었다. 소풍날 오전 내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저기가 우리 동네라고 누군가 말해 깜짝 놀랐다.

감성은 지성과 대립하지 않는다

한번은 친구들한테서 학교 뒷산에 가는데 따라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예닐곱 명쯤 익숙한 자세로 나뭇잎을 살피면서 산속으로 올랐다. 그러다가 멈춰서서, 들고 온 곡괭이로 뭔가 캐내기 시작했다. 땅속에도 씹을 만한 게 자란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칡이었다. 어떤 칡은 그냥 버렸다. 칡에도 종류가 있는데, 씹으면 정말 밥맛이 나는 밥칡이 있고, 딱딱하기만 한 나무칡이 있다는 것이었다. 신기한 것은, 친구들은 겉모양만 보고도 단번에 그것들을 구분해내는 것이었다. 몇 번을 더 따라다니면서, 나도 그걸 구분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쉽게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 능력 덕택에 친구들은 나뭇잎에서 땅 밑으로 이어지는 선을 감각하고 있었다.

감각은 우주를 구성하는 많은 선들을 따라가게 하는 능력이다. 그 점에서 감성은 지성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의 도움을 받아 그 선을 추적하게 한다. 감성이 멈춘 곳에서 지성은 감성을 실어나른다. 예를 들어 선물받은 초콜릿은 그저 달콤할 뿐이지만, 그 맛이 실제로 어떻게 얻어지는지는 <font color="#003366">‘초콜릿은 천국의 맛이겠죠’</font>와 같은 기사 덕분에 알게 된다(745호 표지이야기 참조). 초콜릿이 이제 마냥 달콤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것에 연결돼 있는 선들을 타고 새로운 진동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맛의 이름은 이제 ‘달콤하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쯤 될까. 그 맛을 느낀다면 뭔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협력 안에서 감성이 지성보다 우월한 것은, 그것이 ‘지금 바로 여기’의 경험에 와닿는 선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각만으로 그 선을 충분히 추적할 수는 없지만, 감각이 없다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감성에는 취향의 정교화와 다양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좋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좋은 출발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민한 감성을 갖지 않는다면, 20년 전에 읽은 책으로 여전히 세계를 설명하는 지성의 나태함에 빠지기 쉽다. 결국 문제는 감성과 지성 사이의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감성과 좋은 지성을 함께 갖는 데 있다.

커피는 브라질·콜롬비아 어느 고장의 것이다. 뛰어난 감성은 그곳에 가닿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상품화 때문이다. 상품화는 이익을 내기 위해 선을 분절한다. 재배와 소비는 직접 연결되지 않고, 농장·하청·착취·수입·유통·광고·판매·할인 등으로 조각난 단계를 거쳐 연결된다. 원두커피를 매장 테이블에 늘어놓고 원주민들의 사진을 원용하면서 조각난 선을 상상적으로 연결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분절된 연쇄의 끝에 대도시가 있고, 도시는 상품의 출력 단자로 포위된다. 그에 맞춰 소비자의 감각은 입력에 반응하는 단말기에 가까워진다. 이런 경우 단말기가 아무리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더라도, 그것은 감성의 수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상품화의 조각, 산속의 등굣길

감성은 지성만큼이나 개체에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능력이다. 좋은 감성은 입 안에서 커피의 열두 가지 맛을 식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을 뒤지며 칡의 종류를 구분했던 친구들의 능력 속에 있다. 산속으로 나 있는 기나긴 등굣길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좋은 감성은 지성의 도움을 통해 분절된 세계의 선을 복원해나가는 데 있다. 오늘날 그것은 특별히 어렵다.

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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