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치고는 소슬한 저녁이었다. 이튿날 새벽에 그토록 무시무시한 뇌우가 퍼부을 것을 예견하진 못했다. 서울 조계사 한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라 이름지어진 공간에서 우리는 만났다. 인권연대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리영희 선생이 참석했다. 등으로 저 눈먼 군사독재 시절 우리의 정신을 손잡아 이끌던 이다. 2000년 병을 얻어 쓰러진 뒤 우리는 그를 잊고 지냈다고 해야 할 게다. 간혹 투병 소식을 접할 때 안타까움을 느꼈을지언정, 그의 꼬장꼬장한 사유와 비판적 지성에 더 이상 손을 내밀 필요는 없었기 때문일 터다. 그날 저녁 선생이 개념화해준바, ‘인권의 제3기’를 우리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직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힘겹게 단상에 올라 자리를 잡을 때까지 우리는 박수를 그치지 않았다. 의지와 무관하게 자꾸 떨리는 여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맞잡으며 그는 붉은 얼굴로 을 이야기했다. 군사독재 시절 감옥에 앉아 프랑스어로 읽었다는 소설의 한 대목.
도망치던 장발장과 코제트가 다리를 건너려다 자베르 경감의 부하들에게 앞뒤로 포위당한 순간, 어서 체포하자는 부하들을 만류하며 자베르는 체포영장을 미처 받아오지 못했으니 철수하자고 명령한다. 장발장을 체포한다면 신문의 대서특필감이 될 테고 그 와중에 체포영장 없는 불법 체포 사실도 드러날 테고 이는 자칫 장관이 의회에서 불신임당할 만큼 파장을 일으킬 터이므로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고 한다. 설령 다시 장발장을 손아귀에 넣는 게 몇 년 뒤가 될지 모르더라도 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1830년대였다.
선생은 12줄 정도 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쇼크”를 받았다고 했다. “영장 없이 끌려간 광주형무소”에서 2년형을 살고 있던 처지였다니, “프랑스혁명 이후 민주화와 인간 존중의 모든 가치가 들어 있는” 이 대목의 독서에서 감전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프랑스보다 160년 이상 뒤져 있는 조국의 인권 현실이 얼마나 차갑게 피부를 파고들었을까.
선생은 그렇게 ‘인권의 제2기’를 살았다. 민간 독재인 이승만 정권의 ‘제1기’는 그나마 숨쉴 틈이라도 있었다면, 박정희·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제2기에선 “인간으로서의 자주성과 독립성이 부정”당하고 “동물의 법적 대우”를 받으며 “그 모멸감으로 자살하는 이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던 시절이었다.
전직 대통령의 투신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낳은 ‘인권의 제4기’를 맞아 선생이 치를 떠는 이유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제3기’를 거치며 신병 치유에만 전념하던 그를 이날 300여 대중 앞으로 불러낸 이유다. 그의 메시지는 간명했다. 지금의 지배 집단은 “비인간적이고 오로지 물질주의적”이며 이제 한국 사회는 “파시즘의 초기”에 들어섰다. “지향하고 숭배해야 할 가치라고는 돈밖에 모르는”, 그래서 “인간의 존재가치가 말살되어가는” 세상이 다시 왔다. 장발장을 구원했던 인권의 원칙과 절차적 정의는 다시 다리 밑으로 처박혔다.
선생의 강연에 이어 무대에 오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을 불렀다.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옆자리에 앉은 지인은 마흔 줄에 낮게 쿨쩍거렸다. 저 빛바랜 1980년대의 노래가 그 여름밤 우리의 노래가 됐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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