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은 때로 축제의 무대이고, 때로 토론의 장이며, 때로 화형장이다.
1553년 10월27일 오전 11시 스위스 제네바의 샹펠 광장에서 미겔 세르베투스가 불타는 장작 더미 위에서 그가 쓴 책들과 함께 불타 사라졌다. 미리 목을 졸라 죽이거나 마취를 한 뒤 화형을 집행함으로써 고통을 줄여주는 방식도 있었건만, 세르베투스는 말짱한 정신으로 생살이 타는 고통 속에 죽어가야 했다. 이 극악한 형벌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제네바는 가톨릭 권력을 몰아낸 종교개혁가 칼뱅의 철권통치 아래 있었다. 가톨릭은 물론 신교 사상 중에서도 칼뱅의 생각과 다른 것은 일절 용납되지 않았다. 칼뱅과 다른 성서 해석을 책으로 낸 행위, 오직 그것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장으로 인도했다. 중세 가톨릭의 부패와 독선에 맞서 새로운 기독교를 구현한 제네바에서 종교재판과 화형이라는 비인간적인 악습이 어느새 복원된 것이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칼뱅은 검열과 탄압으로 지식인들의 입을 봉쇄했고, 거리의 사소한 주먹다툼을 난동으로 몰아 반대파를 붙잡아 고문하고 처형했다.
독일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런 시대에 양심의 명령에 따라 칼뱅을 비판하며 그 대가로 고통스런 삶을 살아간 유일한 지식인이던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의 이야기를 책으로 소개했다. (안인희 옮김, 바오 펴냄). 이 책은 1930년대 히틀러의 파시즘이 지배하던 시기에 출판됐다. 사상과 표현을 억압하는 증오의 강압 정치로, 16세기와 20세기가 기묘하게 오버랩된다. 츠바이크가 카스텔리오를 불러낸 건 우연이 아니었다.
광장이 마을 사람 모두 명절을 축하하고 노고를 위로하며 술과 풍성한 음식을 즐기는 곳일 때는 평화의 시대다. 광장이 마을 사람 모두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공통의 꿈을 빚어내는 공간일 때는 난관이 가로놓여있을지언정 희망의 시대다. 그러나 어둠의 시대가 닥치면, 광장은 텅 빈 채 곁눈질로 서로를 흘기는 그림자 몇 개만이 잰걸음치는 을씨년스러운 장소가 된다. 그리고 급기야 마을 사람 모두의 공포를 빨아들여 악마의 혀처럼 불을 뿜는 화형의 무대가 된다.
지난해 촛불 정국 이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간혹 관제 축제의 어설픈 열기로 채워지곤 했으나, 더 이상 시민의 축제가 열리는 공간도, 공동체의 의제를 토론하는 공간도 아니었다. 광장을 둘러친 ‘차벽’은 기묘하게 조형화된 공포다. 그리고 그곳에서 화형식이 거행된다. 전직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을 추모하고픈 순수한 정서가 거기에서 화형당했다. 목소리를 모아 억울함을 호소하고픈 힘없는 사람들의 애통이 거기에서 불태워졌다. 누구든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거기에서 불살라졌다. 침묵이 찾아왔다. 악마의 혀 같은 불꽃은 ‘21세기의 카스텔리오’들을 부르고 있다.
중세 암흑기를 가까스로 벗어나 종교개혁을 막 이룬 시점에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지켜본 카스텔리오의 탄식은, 어렵게 이뤄온 민주주의의 종언을 지켜보는 우리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카스텔리오, , 위 책에서 재인용)
서울광장에 깔린 켄터키블루그래스가 유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이글거린다. 풀빛이 붉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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