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5만7천이란 숫자

등록 2009-04-01 10:50 수정 2020-05-03 04:25

미국에 ‘제임스 아론슨 사회정의 언론상’이란 게 있다. 세계 평화와 사회정의,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평생 글을 쓴 기자 출신 언론인 제임스 아론슨을 기리는 상으로, 차별·경제 정의·시민적 자유 등을 둘러싼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천착한 언론인에게 수여된다.
2003년 이 상의 수상자 명단에 존 도넬리, 콜린 니커슨, 데이비드 필리포브, 라자 미슈라 등이 들어 있다. 이들이 에 연재한 기사가 수상의 영광을 안겼다. 이들은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한 보고서에 주목했다. 전세계적으로 한 해 동안 880만 명가량이 질병에 대한 기초적인 치료·예방 조처가 이뤄지지 않는 탓에 ‘필요 없이’ 숨져간다는 내용이었다.
숫자는 사실 무미건조하다. 흰색 종이에 검정색 잉크를 일정한 모양으로 입혀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상상력이 필요했다. 숫자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일이다. 4명의 기자들은 “오직 증인으로서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WHO 보고서에 언급된 나라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죽어가는 이들과 독자들의 ‘눈맞춤’(eye contact)을 주선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쓴 기사에는 출산 과정이나 사소한 질병으로도 숨져가는 캄보디아, 말라위, 러시아, 과테말라, 잠비아 등지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그려진다. 허름한 병원, 도착하자마자 숨진 에이즈 환자들의 주검과 배우자를 잃은 남녀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병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기자가 현지 병원에서 만났던 어린이가 끝내 숨졌다는 소식은 보스턴에 돌아온 뒤 들었다고 한다.
미국 동부의 평온한 도시 보스턴에 사는 독자들은 WHO 보고서 내용을 전하는 기사에서 ‘880만’ 명의 의미를 체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사를 통해 숫자는 체온을 갖게 됐다(비록 곧 식어버릴 체온이지만). 수상 이유에 나오는 것처럼 이들은 ‘통계에 인간의 얼굴을 입혔다’.
최근 발표된 통계가 있다. 지난 2월 취업자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2.8%나 줄었고, 30대 여성의 경우 취업자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만7천 명이나 줄었다는 내용이었다. 편집회의에서 논의해봤다. 체감하는 기자들이 적었다. 기자들의 지인들은 대개 괜찮은 직장을 가졌고, 그들 가운데는 아직 실업의 고통을 몸소 겪는 이들이 드물었던 모양이다. 줄어든 고용의 대부분은 비정규직, 우리 주변에서 가장 힘겨운 일자리들일 터. 우리 역시 보스턴의 시야 좁은 소시민들이었던 걸까.
30대 여성만 보더라도, 실직한 15만7천 명이라는 숫자 속엔 15만7천 명의 삶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아장아장 걷는 그들의 아이들도 들어 있을 것이다. 반찬이 줄어든 고단한 식탁이 들어 있을 것이다. 새 옷을 마련할 수 없는 쌀쌀한 봄이 들어 있을 것이다. 당장 내일이 걱정되는 불면의 이부자리가 들어 있을 것이다. 꿈 많고 새침했던 15만7천 컷의 여고시절 사진이 들어 있을 것이다.
허랑한 기업인의 ‘돈질’이 정·관계 인사들을 무더기로 녹여버린 추문이 들춰지고 한 연기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파렴치범들이 얼굴을 숨긴 채 면피를 획책하는 요즘, 은 떠들썩한 사건들에 묻힌 한 통계 수치에 주목했다.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눈맞춤’을 제공하고 싶어서다. 15만7천 명의 젖은 눈망울과.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