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있나 보다. 바람에 살풋 낯선 냄새가 섞여 있다. 움트고 설레고 부풀고 피어나는 때, 봄에는 만물의 냄새가 궁금해진다.
어릴 적 봄에는 땅과 놀았다. 딱딱하고 차갑던 땅이 서서히 눅눅해지면, 겨우내 움츠렸던 아이들은 양지바른 골목길 한켠에 모여 회심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못꽂기나 땅따먹기 같은 놀이가 시작되는 때다. 출발점이 있다. 못을 땅에 힘껏 내리꽂는다. 못이 정확한 각도로 땅과 만나면 그 자리에 꽂힌다. 출발점에서 그곳까지 줄을 긋는다. 그렇게 줄을 이어 반환점을 먼저 돌아오면 이기는 놀이. 못이 땅에 꽂히지 못하면 다음 친구 차례. 못을 꽂는 위치는 전략적이다. 상대방의 진로를 가로막는 쪽에 꽂아 줄을 그으면 상대방은 그만큼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상대를 땅이 아직 녹지 않은 쪽으로 밀어붙이면 못꽂기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나는 먼저 반환점과 아주 근접하게 못을 꽂아 돌아나온 뒤 상대방을 에워싸는 거다. 그러면 상대는 내가 만든 좁은 통로로 빠져나와야 한다. 폭 1cm도 안 되는 공간에 정확히 못을 꽂아 빠져나와야 하는 친구는 몇 번 못 실패를 거듭하고는 괜히 분해서 씩씩거린다.
그러나 땅은 어머니 살결 같았다. 폭신폭신하고 따사롭고 은은한 향이 났다. 서쪽 하늘이 붉어지고 어서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어머니들의 외침이 골목길에 퍼질 때까지 봄바람은 아이들의 장난기를 놓아주지 않았다.
요즘 도시의 아이들에겐 골목길이 없다. 친구를 만나는 건 학원에서다. 영어·수학 시험으로 못꽂기 경쟁을 대신한다. 훨씬 살벌한 놀이다. 어릴 적 경쟁의 결과가 서열화된 상급학교 진학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돈벌이 수준을 좌우하게 된다는 걸, 아이들도 직관으로 깨닫고 있다. 골목길에서 땅따먹기 놀이로 그려진 영토는 신발로 쓱쓱 지우면 도로 공통의 땅이 됐지만, 지금 벌이는 아이들의 땅따먹기 놀이는 좀체 지울 수 없는 분계선을 아이들의 미래에 그려가고 있다. 부모들은 그런 미래가 불안하다.
사교육과 입시 경쟁의 사슬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종착점은 누가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갖고 높은 소득을 올리느냐는 문제다. 삶의 수준을 보장하는 몇몇 한정된 선택지를 향해 남보다 앞서 못을 꽂고 전략적으로 선을 그어가야 한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의 직종별·분야별 삶의 수준을 결정하는 건 꼭 그런 방식이어야 할까.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전문직은 문호를 넓히고 그 안에서 경쟁하게 하면 된다. 많은 이들이 선호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면, 법정 임금을 높이는 식으로 소득수준을 보장해주면 된다. 민주공화국에서 이 모든 걸 결정할 권한은 주권자, 바로 우리와 같은 부모들에게 있다. 불투명한 아이들의 미래에 불안해하며 날마다 승산을 알 수 없는 싸움터로 아이들을 내보내고 싶은가, 아니면 해질 녘 골목길에서 밥때를 잊고 있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가.
이런 부모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위정자들은 아이들에게 대못을 하나씩 쥐어주며 서로 찌르라고 부추기는 정책만 내놓고 있다. 봄을 알리는 바람도 아이들의 가슴엔 시리기만 하다. 봄아, 물렀거라. 여기는 동토의 왕국, 너와 놀아줄 아이들이 아직 없구나.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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