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호, 에는 뭔가 특별한 것을 써야 할 것 같은데, 사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아니, 나이 먹는 게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해를 나타내는 숫자 따위가 바뀌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세상의 비밀을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TV에서는 배지를 단 똑같은 얼굴들이 여전히 책상으로 막힌 문을 열기 위해 헤머와 전기톱을 들이밀 것이고, 강바닥을 헤집는 사업을 이름만 바꾸어 들이대면서 웃기지 않는 농담들도 계속될 테지. 변하는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상한 나라 거울나라처럼, 12년 전 어느 날과 똑같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려고 한다.
같은 날 새벽
1996년 12월26일 새벽, 그러니까 내가 막 고시생 딱지를 떼고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지내던 겨울이었는데, ‘대쪽’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전직 대법관은 자기네 당 사람들을 버스에 태워, 야당 의원들을 따돌리고 회의장으로 몰려가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통과시켰다. 그러고 나서 1997년 새해 첫머리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가. 민주노총은 노동법 날치기에 강하게 반발하며 20세기 말 서구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들다는 ‘총파업’을 조직해냈고,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외면당하는 다수의 폭력 앞에서,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박 않던 무표정한 얼굴들이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어 나왔다. 결국 날치기로 통과된 법률들은 제자리를 찾아갔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의 여파는 ‘대세론’을 굳혀가던 그 전직 대법관이 그해 말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지는 데 꽤 영향을 미쳤다고들 한다.
어쨌든 기막힌 우연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잘 보내고 그해 남은 며칠을 잘 마무리하려는 마음으로 긴장을 늦추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올해 안으로 마무리’라는 미션이라도 부여받은 것인지, 이번에도 같은 날 12월26일, 한나라당은 도대체 급할 게 없어 보이는 이상한 법률들을 ‘다수결 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사실 여당 대표는 1996년 일을 악몽으로 떠올리며 26일만은 피한다고 한다지만, 이 글이 신년호에 실릴 때쯤이면 불길한 기시감은 이미 현실이 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1997년에는 그해 말 대통령 선거를 통해 심판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럴 일도 없어 보이고 경제위기 한파 영향이 워낙 턱밑에 차 있는지라, 사람들이 당장은 큰소리 내지 않고 절망만 가슴에 쌓고 있을 것이라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소리 없이 쌓이는 절망과 냉소가 가장 무서운 것임을 모르지는 않겠지.
다소 생뚱맞은 이야기지만, 뜬구름 잡는 고민뿐이던 고시생에게 1997년 총파업은 법을 통해, 특히 노동법을 통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걸 배운 잊지 못할 수업이기도 했다. “아직 노동법만 다루냐”고 애정 어린 걱정을 하는 친구와 선배들도 있지만, 여전히 노동법이 살아 움직이는 매력 덩어리라서 떠날 수 없다고 치기를 부리는 것도 어쩌면, 그때 목격하고 직접 힘을 쏟았던 경험 때문인 듯하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편이 나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고, ‘어떻게’라는 질문은 결국 “누구 편에 설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의어임을 배웠다고나 할까.
누구 편에 설 것인가감세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면 복지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복면시위금지법이 ‘비겁자 응징법’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 난리굿 와중에 “쟁점 법안을 빨리 통과시키는 데 공감하지 못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자기네들 지지율 상승으로 받아들여 좋아하고 있다는 한심한 야당 사람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고 싶다. 이제 말해보시라,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그리고 제발 잘 보이게 좀 서 계시라.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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