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방화. 한겨레 강창광 기자
300원짜리 라이터 2개를 합쳐서 600원의 라이터가 600년의 역사를 태웠다. 주거지 보상 문제 등 무언가 정부에 불만을 품은 채아무개(70)씨의 ‘라이터질’에 600년의 문화유산 국보 1호 숭례문이 활활 타올랐다. 하필이면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것은 한 해 내내 타오를 불길의 불길한 예고였을까. 누가 그에게 ‘라이터를 켜라’고 했던가!
5월의 광화문에서 촛불잔치가 시작됐다. “미친 소 너나 먹어!” 여고생이 앞장서 외쳤고, 아이를 지켜야 한다며 엄마들이 촛불을 들었고, 삼팔육 아저씨들이 늦어서 미안하다며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들불처럼 세대를 넘어 경향각지로 번졌다. 불길에 화들짝 놀란 경찰은 ‘명박산성’을 쌓아 기네스북 등재를 노렸다. 그리고 100여 일. 촛불은 쉼없이 타올랐고 진압도 갈수록 거세졌다. 그러나 촛불이 밝힌 생명과 일상과 인권의 불길은 촛불을 들었던 이들의 가슴에 지우지 못하는 화인을 남겼다. 참, 누구는 “온 국민이 촛불집회 나가면서 펀드 부을 때가 몇 년 안엔 오기 힘든 행복한 때였다”고 추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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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5월은 잔인했다. 일주일을 사이에 두고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버마 해안을 덮쳤고, 진도 7.8의 강진이 중국 내륙 쓰촨성을 강타했다. 버마에선 6만여 명, 쓰촨에선 8만여 명이 숨졌다. 지구촌이 슬픔에 잠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4년 동남아를 초토화했던 쓰나미 사태를 두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에 내린 재앙”이라는 신앙고백을 했던 분들이 이번엔 자숙했단 것일까.
4. 올해의 참화 Ⅱ
안양에선 초등학생 혜진·예슬이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고, 대구에선 초등학생들 사이에 집단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다. 대부분 가난한 맞벌이 부부가 생계를 위해 집을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새삼 가난한 아이들이 안전에도 가난하단 사실을 확인하는 사건이었다. 혜진·예슬법 등 무성한 대책이 나왔지만, 실효성 있는 대책이 마련됐단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잔인한 현실만 확인할 밖에.
고 최진실씨(연합). 마린보이 박태환(베이징=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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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연예인을 위한 나라도 없었다. 1990년대 ‘국민 요정’은 2000년대 ‘국민 아줌마’가 됐으나, 루머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최진실씨가 숨졌고, 사채에 시달리던 안재환씨도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일까.
6. 올해의 영화(榮華)
사시사철 울화통이 터지는 가운데, 그나마 여름엔 시원한 소식도 들렸다. 미란씨의 아름다운 몸매, 용대 왕자의 살인 윙크, 마린보이 태환이의 승전보가 답답한 여름을 식혀주었다. 여자핸드볼 대표팀 언니들의 눈물의 올림픽 졸업식도 있었다. 그렇게 2008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취해, 티베트 민중의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그가 태어난 1961년, 미국의 16개 주에서 인종 간 결혼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그리고 47년이 흘러 케냐인 아버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과연 그는 또 다른 미국의 변화를 끌어낼 것인가. 검은 케네디냐, 검은 노무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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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장에서 신발에 맞을 뻔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연합). 코스피 1000선 붕괴(한겨레 김진수 기자/ 왼쪽부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새 이정표가 세워졌다. 아, 탁신의 잔당을 몰아낸 아시아 아나키즘의 선구자 민주주의민중연합(PAD)의 영웅적인 투쟁! 이제 더 이상 스쿼팅(무단점거운동)은 서구 아나키즘의 전유물이 아니다. 빈집 점거라는 스쿼팅의 고전적 원칙을 붐비는 공항 점거라는 새 전술로 갱신하신 PAD의 투쟁으로 마침내 7년여 만에 탁신 무리를 몰아내고 민주당 정권을 창출했다. 공항 이전엔 정부청사도 장기간 점거했으니 그분들은 무정부주의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분들 중 일부는 방콕 엘리트는 여러 장의 표를, 시골 농민은 한 장의 표를 가지는 ‘신민주주의’ 전술도 주창했다. 아, 무에타이 경기장 입장권이 아니라 투표권 말이다.
부시를 신발로 부수려다 영웅이 된 사나이. 이라크 기자 알자이디가 부시 미 대통령을 향해 던진 신발 두 짝이 세계를 흔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는 그의 신발 한 짝에 1천만달러를 내겠다고 호언했고, 이집트의 아버지는 스무 살 딸을 그와 결혼시키겠다고 나섰다. 이토록 맹렬한 아랍 남성의 대동단결! 신현림 시인의 첫 시집 제목은 , 언젠가 만들어질 알자이디 영화의 제목은 아닐까.
뉴욕 나비의 날갯짓이 한반도에 폭풍을 일으켰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서울 증시에 날개 없는 추락을 선사했고, 원화 환율에 추락하지 않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수출은 막혔고, 내수는 얼었다. 추위는 가난한 동네에 먼저 와서 서민 경제가 얼었다. 울화가 치밀어도 하소연할 곳도 마땅치 않은 이상한 세계의 겨울이 왔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