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드라마 제작 과정을 소재로 만든 SBS 드라마 는 “드라마 자아비판”이란 평가를 받으며 시청률 25% 안팎의 ‘대박’을 터트렸다. 이 드라마는 방송사와 외주제작사·연예기획사의 관계, 협찬과 PPL(간접광고), 스타 시스템, 신인배우 ‘끼워 팔기’, 시청률 지상주의, PD·작가를 비롯한 방송가 사람들의 모습 등을 실감나게 그리며 드라마 제작 관행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짚어냈다. 하지만 안에서도 보조출연자(엑스트라) 같은 ‘드라마 제작 인력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층의 실상은 빠져 있었다. 더구나 이 드라마 외주제작사인 케이드림은 방송이 끝난 지 여섯 달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보조출연자 400여 명의 출연료 1억여원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왜 보조출연자들은 ‘반성문’에서도 다뤄지지 못하고, 노동의 대가마저 받기 어려운 걸까.
방송계에선 ‘기형적인 외주제작 시스템’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방송영상산업 육성과 콘텐츠 다양화를 내세워 1991년에 도입된 ‘외주 의무편성 비율’은 3%에서 현재 40%로 늘어났다. 방송사는 제작비가 많이 드는 드라마·쇼·오락 프로그램 대부분을 외주제작으로 돌렸다. 자체 제작의 절반 비용으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고, 직접 만들 땐 받을 수 없는 기업 협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13일 한국방송 국정감사에서 한국방송의 외주제작 비율이 1998년 1TV 6.5%, 2TV 25.8%에서 2008년 1TV 25.1%, 2TV 46.2%로 급증한 사실이 지적됐다.
만 봐도 총 제작비 50억원 가운데 SBS가 지급키로 한 돈은 27억원뿐이다. 케이드림은 나머지 제작비를 투자사와 PPL, 기업 협찬 등으로 충당해야 했다. 그런데 SBS가 약속한 27억원 가운데 9억원이 덜 지급된 상황에서 투자사 일부가 케이드림에 투자금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자 SBS는 9억원이 출연료와 스태프 인건비 등으로 쓰일지 알 수 없다며 지급을 보류해버렸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를 비롯해 문화방송 , 한국방송 등의 보조출연자 섭외·출연 용역을 맡았던 기획사 월드캐스팅이 출연료를 제때 지급받지 못해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제작사는 보조출연자가 촬영한 지 통상 두 달 뒤에 출연료를 지급하기 때문에 기획사의 ‘출연료 미수금’은 매달 1억~2억원가량 되는데, 월드캐스팅의 부도 직전 미수금은 1억원을 비롯해 15억원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4월 출연료 40여만원을 아직 받지 못한 보조출연자 고미정(58·가명)씨는 “언제 출연료를 받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했다. 한 달 수입이 60만원 안팎인 고씨한테 40만원은 큰돈이다. 3년 전 사업에 실패하고 카드빚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외아들이 대리운전 등으로 버는 돈은 고스란히 그 빚을 갚는 데 들어간다. 초등학교 2학년 손자까지 세 식구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가 벌어오는 출연료 덕분인데, 들어와야 할 돈이 몇 달째 들어오지 않으니 늘어나는 건 돌려막기로 불어가는 신용카드 대금과 한숨뿐이다. 촬영이 없는 날 새벽이면 집 근처 야채 도매시장에 나가 팔다 버린 배추나 푸성귀를 주워다 김치도 담그고 반찬도 만들어 ‘새는 돈’을 줄여보지만, 없는 살림에 ‘출연료 미지급’은 너무 가혹한 현실이다. 고씨는 “아침·점심 식대로 받는 9천원이면 우리 식구 며칠 반찬값인데, 그거라도 아끼려고 어떻게든 도시락 싸서 다니며 번 돈인데….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부르는 데가 많지만, 나처럼 나이 먹은 사람은 출연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지 않아 더 힘들다”고 했다.
그럼 출연료를 받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보조출연자 김지윤(53·가명)씨는 5월1일 대구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어 이날 밤 12시께 방송사 앞에 도착했다. 새벽 1시 출연자들을 실은 제작사 제공 버스가 출발했고, 새벽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촬영했다. 물론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더 많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부를지 몰라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다시 버스를 타고 집결지로 되돌아온 것은 저녁 9시. 장장 21시간을 투입한 노동의 대가는 7만900원이었다. 기획사가 준 출연료 명세서엔 ‘시간 전 (출연료) 3만7천원, 시간 후 (출연료) 1만5천원, 식대 1만3500원, 교통비 5400원’이라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보조출연자 소개용역을 맡은 기획사와 방송사가 맺은 용역 계약서의 출연료 지급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김씨가 이날 받아야 할 돈은 10만9210원이다. 우선 ‘시간 전’(오전 9시~오후 6시 촬영분)이라고 표시된 기본 출연료가 3만7천원이 아니라 5만3천원이고, ‘시간 후’(시간 전 이외의 촬영분)로 적힌 연장수당은 3만2860원이다. 교통비는 7천원, 식대는 한 끼에 5450원씩 1만6350원을 받아야 한다. 사라진 3만8310원은 어디로 갔을까.
한 중견 기획사의 간부는 “보통 보조출연자 출연료의 20~30%를 소개료로 뗀다”고 했다. 즉, 김씨의 3만8310원은 김씨를 소개해준 기획사가 수수료로 챙겼는데, 정작 김씨 자신은 자신이 덜 받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직업소개 요금 기준을 정해놓은 노동부 고시를 보면, 소개료는 임금의 4%를 넘어선 안 되고,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현행 기획사의 소개료 비율 산정은 명백한 불법이다. 문계순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은 “장기 촬영을 할 땐 1인 1실 기준으로 하룻밤에 3만270원씩 숙박비를 지급하도록 돼 있지만, 기획사에선 되레 5천원씩 받고 숙소를 잡아준다. 깎은 식대를 주는 것도 아까워 김밥 한 줄로 식사 제공 생색을 내기도 한다. 우리 밥값, 잠값까지 착취하는 걸 고쳐보려고 항만노조처럼 노조가 노조원들의 직업 소개를 할 수 있을지 구청에 문의해봤지만,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보조출연 인력 가운데 이 일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1천 명가량이다. 2년 전 보조출연자 노조가 결성된 건 이렇게 먹고살려고 하는 일에서 기본적인 ‘게임의 규칙’조차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는 제일 먼저 한국예술, 태양기획, 한강예술, 대웅기획, 월드캐스팅 등 대형 기획사들과 단체교섭을 시도했다. 하지만 기획사들은 △보조출연자는 근로자가 아니므로 단체교섭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노조 설립 과정의 민주적 절차성·대표성이 의심되며 △기획사는 방송사의 하부조직과 유사해 단체교섭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노조는 이것이 부당노동 행위라며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냈지만 기각당했다. “조합원들이 (기획사와) 사용종속 관계를 맺고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로 볼 수 없고, 여러 기획사에 중복적으로 신상명세서를 등록해 선택적으로 노무를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게 지노위의 설명이었다. 이에 문계순 위원장은 “보조출연자들은 출근 시간부터 두발 상태까지 기획사의 철저한 지휘·감독 아래 정해진 근무 시간에 일하고 정해진 보수를 받는다. 방송사와 기획사들이 체결한 용역 계약서를 봐도, 보조출연자의 공급·운영을 기획사가 몽땅 위임받았는데 어떻게 단체교섭 상대가 아니라는 거냐”고 반박했다. 노조는 이달 말 중앙노동위원회에 다시 구제신청을 낼 계획이다.
날벼락 같은 해고 통보에 구제신청 나서한국방송 보도국에서 FD, 영상편집, 행정 업무 등을 맡았던 비정규직 노동자 15명도 ‘공룡’을 상대로 쉽지 않은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방송에서 17년 동안 그래픽·영상편집을 해온 임민자씨는 10월2일 날벼락 같은 해고 통보를 받았다. “오래 근무한 사람 순으로 자른다”는 것이 설명의 전부였다. 한국방송은 이날 보도국 소속 비정규직 40여 명한테 ‘10월 말까지만 나오라’고 통보했다. 짧게는 4년부터 길게는 17년까지 일해온 이들은 비정규직보호법의 적용을 받아 곧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에 부담을 느낀 회사가 해고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한국방송을 ‘내 회사’로 여기고 살아온 이들의 자리는 방송전문 대형 파견업체의 파견 노동자들로 채워졌다. 임씨는 “동료들의 출산휴가, 병가 등으로 3인분의 일을 묵묵히 해왔는데 이렇게 사람을 내치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 가운데 15명은 이대로 주저앉는 대신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내기로 했다. 올해로 8년째 PD를 보조하는 FD 일을 해온 강영준(28)씨는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하면서도 방송 일에 열정을 키워갔는데, 이젠 정말 정 떨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잘되면 억울하게 잘린 동료들을 비롯해 한국방송 비정규직 1159명이 다 살 수 있지 않겠냐”고 ‘싸우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이번에 잘린 선배들 모두 가장이고 아이의 엄마·아빠인데, 회사가 내치면 갈 데가 없다. 꼭 이겨서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들이 가는 길이 순탄해 보이진 않는다. 한솥밥을 먹으며 살을 맞대고 살아온 한국방송 노조조차도 “기본적으로 비정규직을 다 수용할 순 없다는 게 회사 방침”이라며 “FD나 행정 담당자 등은 우리 조합원이 아니기 때문에 노조가 책임질 처지가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영화노조 “힘들어도 스스로 권리 찾기”한계는 있지만, ‘사용자’가 상대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화산업노조의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2005년 출범한 영화산업노조는 국내 영화사들의 협의체인 영화제작가협회와 지난해 임금·단체협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노조엔 배우를 제외한 연출·제작부, 촬영·조명부, 미술, 의상, 소품, 분장 등 분야의 영화산업 노동자들이 가입돼 있다. 첫 임금협약에서 양쪽은 시급 1만1천원, 주 하루 휴일, 4대보험 가입, 유급휴가 보장, 모성보호 등의 조항에 합의했다. 지난 7월15일 두 번째 임금협약에선 △임금 6% 인상 △미술·의상·분장·소품·동시녹음 분야 노동자의 최저임금 설정과 고용보험 적용 △임금 지급 기준에서 빠져 있던 10억원 미만 저예산 영화에 수익배분제 도입 등에 합의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현재까지 단체협약을 적용한 영화는 등 20여 편에 이른다.
김현호 영화노조 정책실장은 “노조가 만들어진 2005년은 한국 영화산업의 파이가 커져 ‘나눠 먹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일 때였고, 그래서 단체협약 시도도 먹혀들었다”고 분석했다. 협약을 적용한 영화의 경우 노동 시간이 주당 60시간에서 50시간으로 줄었고, 영화사가 제작비를 아끼려고 프리 프로덕션을 압축적으로 진행해 영화 촬영 일수 자체도 줄어드는 등 노동·생산 과정이 ‘합리적’으로 조정되기도 했다. 김 실장은 “이 때문에 오히려 스태프들의 임금은 더 줄어버려 조합원들의 불만도 적지 않고, 1천명 가량인 진성 조합원 수도 크게 늘지 않고 있다”면서도 “그래도 노조를 통해 스스로 권리를 찾아가면서, 현장이 바뀔 거라는 기대를 품은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뻔한 적자 구조, 스타시스템
스타 싸움에 단역 등 터지네
‘방송의 그늘’을 키우는 건 방송사의 비현실적인 제작비 후려치기뿐만이 아니다. 외주제작사들의 지급 능력을 넘어선 스타 몸값 올려주기 경쟁은 제작사는 물론 기획사, 보조출연자와 스태프의 목을 연쇄적으로 옥죄고 있다.
방송사에 ‘흥행 보증수표’를 제시하고 외주를 따내야 하는 제작사는 2007년 현재 850개가 넘는다. 하지만 보증수표가 돼줄 ‘톱스타’는 그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캐스팅 전쟁이 벌어진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연구자료를 보면, 2000년만 해도 회당 360만원 선이던 주연 연기자 출연료는 2005년 1300만원으로 급격히 뛰어올랐다. 일부 톱스타들의 회당 출연료는 2천만원을 훌쩍 넘는다. 의 배용준은 회당 1억2500만원을 받았고, 박신양은 에서 회당 5천만원을 받았다. 의 경우 회당 제작비가 1억3천만원인데, 주연배우 4명의 출연료가 9천만원을 넘는다고 제작사인 김종학프로덕션의 김종학 대표가 하소연한 적도 있다. 이는 제작비의 70%다. 나머지 돈이 ‘나머지 사람들’한테 돌아간다.
방송사는 제작비를 절반밖에 지급하지 않는데 제작사들은 나머지 제작비를 어디서 감당할 수 있을까. 간접광고나 협찬은 경기가 나빠지면서 갈수록 줄어들고, 한류 열풍을 탄 외국 판매와 각종 부대사업 수익이 있다지만 실현되기까진 너무 먼 미래다. ‘초대박’ 와 을 제작한 김종학프로덕션이 지난해 94억원 적자를 기록했고, 두 프로그램의 단역·보조출연자 출연료와 스태프 인건비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게 놀랄 일이 아닌 셈이다. 심지어 SBS 의 경우 주연인 소유진·이훈조차도 출연료를 다 받지 못해 다른 연기자 10여 명과 함께 제작사 수앤영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일부 톱스타 출연료 폭등은 제작사는 물론 연예기획사에도 파장을 미쳤다. 박대해 한나라당 의원실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제작사나 연예인이 소속된 기획사 직원들이 월급이나 퇴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노동부에 진정을 내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연예기획사를 포함해 제작사를 상대로 낸 노동부 진정은 2003년 405건에서 지난해 638건으로 급증했다. 올해는 9월 현재 541건이다. 팬텀엔터테인먼트는 올 9월까지만 해도 11건의 진정을 당했고, 등을 제작한 제이에스픽처스는 임금 체불 등으로 2005년 한 해에만 26건의 진정을 당했다.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등이 만든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의 김영선 부위원장은 “선택당하는 직업인 배우가 자신의 ‘상품성’에 적합한 출연료를 받아가는 걸 누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도 “하지만 대다수 출연자와 스태프들이 출연료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려면 노조가 방송편성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의 출연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왜 같은 제작사가 만드는 를 방영하느냐”는 얘기다. 미국의 경우 배우조합이 방송편성위원회에 참여해 제작사의 재무구조, 실적, 출연료 지급 능력 등을 모두 점검한 뒤 자신들의 의견을 낸다고 한다. 박대해 의원도 “드라마 출연자나 스태프들은 제작사의 출연료 지급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프로그램 출연을 결정해야 한다”며 “출연료 미지급·체불 관행을 뿌리 뽑으려면 방송편성위원회에 배우와 스태프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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