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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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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의 퇴화와 촛불의 진화

등록 2008-06-26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렇게 판단한 것이리라. ‘벌써 달포를 이어 밤낮으로 가두를 누볐으니 사람들의 체력도 바닥이 났을 것이고 이제 장마철로 들어가는 참이니 촛불집회도 이제 내리막이다.’ 이번주 정부 여당과 관변 우익 단체, 보수 매체와 보수 논객들의 행태는 가히 총반격이라 할 만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보수우익이라고 나라를 걱정하는 나름의 주장과 행동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저 황당한 것이 있다면, 그들이 단 7주 만에 몇십 년 전으로 퇴화해버리는 모습이다.

꼴통 우익은 아닌 듯 했는데…

옛날 이들은 반대 세력의 주장과 행동은 모두 불순 세력의 작태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군대나 경찰 등 폭력 기구와 함께 각종 감시와 사찰, 그리고 자신들의 뜻대로 여론을 만들어갈 수 있는 각종 법적·제도적 발명품들을 활용했다. 이후 훨씬 세련된 형태로, 이념적으로는 ‘세계화’라는 구호를 앞세워 반대 세력을 ‘국가 경쟁력을 좀먹는 변화 저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면서, 또 방법적으로도 직접적인 폭력이나 각종 억압 제도를 활용하는 것보다는 막강한 힘을 가진 언론 매체 몇 개와 그에 딸린 지식 분자들의 입과 붓에 의존하는 식으로 진화한다. 세기가 바뀌면 이러한 세련화는 폭과 깊이를 더하게 된다. ‘효율성’과 ‘경쟁력’ 등 현란한 수사를 활용하면서 대기업이나 대학과 같은 기성 제도까지 깊숙이 포섭해 사회 전체의 담론을 생산과 유통과 소비 모두에서 지배해버린다. 그람시도 울고 갔을 법한 이들의 ‘진지전’은 이명박 정권의 성립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군홧발 혹은 ‘불순 세력’ 따위나 휘두르는 예전의 ‘꼴통 우익’이 아닌 듯했다. ‘아마추어 정권’의 서투른 운영으로 ‘잃어버린 10년’에서 나라를 구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구현해 마침내 ‘선진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적·실천적 역량을 갖춘 ‘CEO 정권’임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세련된 모습의 그들이 5월 초부터 퇴화를 시작한다. 진화해왔던 순서 그대로. 처음에 이들은 쇠고기 협상 타결이야말로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게 된 역사적 쾌거라고 주장했다. 오바마의 발언 등으로 FTA의 조기 체결 가능성이 사라지고 미국 쇠고기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자 먼저 이들은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 등을 한편에, 그리고 ‘몇십 년째 멀쩡히 미국 고기 먹어온’ 미주 한인회장들의 발언을 다른 편에 내걸었다. 정부와 관변 매체들은 물론 ‘전문가’들과 주미 대사까지 나서서 그러한 염려가 ‘글로벌 스탠더드’와 ‘과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한국인들의 작태라고 치부하려 했다. 하지만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그러한 논리는 판판이 깨지고, 되레 일을 처리했던 현 정권의 관료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능하고 독선에서만 탁월했는지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편을 들던 논객들과 매체들의 무지와 말바꾸기와 일방성에 경악하게 되고, 촛불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그러자 곧바로 물대포와 방패,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하루아침에 부둣가 십장으로 만들어버린 ‘명박 산성’이 등장했다. 이와 더불어 전직 군인, 목사님들, 한물간 ‘논객’들이 대거 전면에 나선다. 기도회와 화형식과 LPG쇼가 화려하다. 촛불집회는 ‘포르노’이니 여기에 유모차를 끌고 간 부모들을 처벌해야 한다고도 하며, 또 ‘내란’이니 이를 진압하기 위한 ‘의병’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경찰은 물대포와 체포조 투입이 정당하다고 나오고 있으며, 한나라당은 인터넷 실명제 도입에 착수한다. 가녀린 촛불을 꺼보려고 물대포, 불대포, 매대포, 말대포가 총동원되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드디어 낯익은 합창이 터져나온다. “불순 세력의 선동에서 나라를 구하라!”

촛불은 사람들의 머릿 속으로

일껏 몇십 년간 이뤄놓은 진화의 외양을 이들이 단 7주 만에 ‘퇴화’로 벗어던지게 된 계기가 기껏 미국 고기 한번 실컷 먹(이)겠다는 하찮은 것이라는 점은 실로 비통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서는 ‘촛불’의 급속한 진화라는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타던 촛불은 이미 무수한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옮아서 그들의 머리를 밝히기 시작했다. 또 신문로로 소공동으로 나누어져 흐르던 촛불의 물결은 이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흐르기 시작했다. 장마가 아니라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촛불은 계속될 것이며,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과 빠르기로 진화를 계속할 것이다.

현생 인류와 동일한 두뇌 용량을 가진 호모사피엔스는 대략 4만 년 전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이들이 어디서 나타났으며 어떻게 이러한 급작스런 진화를 이루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라고 한다. 또 그전 몇십만 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전 지구를 덮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이 왜 그때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수수께끼라고 한다.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 것도 같다. 그리고 나도 당신도 진화하는 쪽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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