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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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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남의 돈

등록 2008-05-02 00:00 수정 2020-05-03 04:25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10시의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할아버지가 전화를 받는다. 점점 더 소리가 높아진다. 나중에는 숫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한적한 지하철이 단번에 시끌벅적해진다. 다급한 일에 몰린 할아버지 같은 아저씨는 그런 데 신경쓰고 있을 여가가 없다. 돈이 걸린 문제다. “그래선 안 되죠. 아줌마 혼자서? 아니라고요? 그걸 누구한테 물어봤어요? 그 사람이 그래요? 그래도 다른 사람은 다,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돈을 부은 여러 사람들한테 다 물어서, 어떻게 하겠다고 의사를 물어서, 그런다 하면 해야지, 그걸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면 안 되지.” 계주 아줌마가 어디 딴 데다 돈을 쓰려나 보다. 아니 쓴 건지도 모른다. “그거는 아줌마 돈이 아니잖아요.”

4월22일 이건희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삼성특검이 그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뒤다. 삼성특검은 차명계좌가 1만3천여 개 발견되었지만 자금 대부분은 이건희 회장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진행된 두 특검 중 먼저 종료된 BBK 특검의 결론이 “이명박 것 아니다”로 요약된다면 삼성특검의 결론은 “모두 이건희 것이다”. 이 돈의 전체 규모는 4조5천억원이다.

삼성화재 본사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1만여 개의 차명계좌가 삼성 본관에 있는 은행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삼성특검은 고객에게 줄 돈으로 9억8천만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한 사실을 적발했다. 삼성화재에 보험 든 사람은 그게 다 자기 돈인 것같이 걱정된다. 지하철 할아버지는 그 모든 사람을 대신해 아줌마에게 고함쳤다. 특검은 수사 발표에서 이 마음대로 사용한 사람은 ‘삼성화재 재무책임자’라고 했다. ‘비자금’은 회사를 위해 조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가장 큰 죄는 배임이다. 자신이 등기 이사로 재직 중이던 계열회사 재산에 손실을 끼친 것에 책임을 물어서다. 나중에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열사가 인수해야 할 사채를 아들 이재용한테 헐값에 넘겼다. 하자 없는 물건을 떨이로 팔았다. 딱 한 사람한테만. 주주들은 손실에 분노한다. 교묘하게 손해를 입혔으니 ‘남의 돈’ 갖고 장난친 것과 샘샘이다.

삼성 총수 일가는 고작 주식 지분 1%만으로 전체 계열사를 지배한다. 순환출자를 통해 이 돈을 여기 물리고 그 돈을 저기 물리고 하여 모든 회사를 덩어리로 지배한다. 지하철 할아버지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물리고 물려서 너덜한 돈이 당신 돈이오? “남의 돈 갖고 그러면 안 되지.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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