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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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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배우의 죽음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백은하 〈매거진 t〉편집장


“히스 레저… 이야기 들으셨죠?” 마치 가까운 친구의 부고를 전하듯, 수화기 저 너머의 그는 묻고 있었다. 설레는 유럽 여행을 앞두고, 비행기가 연착되었노라며 나에게 건 전화의 첫마디였다. 2008년 1월22일 배우 히스 레저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오후 3시26분, 뉴욕 맨해튼 소호 브룸 스트리트에 위치한 자신의 집 침실에서 가정부와 마사지 치료사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는 옷을 입지 않은 채였고 침대 주변에는 다량의 수면제가 뒹굴고 있었다. 자살이라고 단정지을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약물 과다 복용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사인은 사망 뒤 10일가량이 지나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이런저런 웹사이트를 돌며 한줄 한줄 그의 부고 기사를 읽고 있는데 오랜만에 친구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정말 충격이지, 히스 레저… 아침부터 그 소식 듣고 어찌나 멍한지… 그럴 이유도 딱히 없는데 어쩐지 일이 손에 안 잡힌다.” 그의 죽음이 한국에 알려진 1월23일, 히스 레저의 얼굴은 많은 지인들의 홈페이지 대문을 장식했고, 수많은 블로거들의 최근 포스팅은 그에 대한 추모사로 넘쳐났다.

도도한 젊은 수사자 같았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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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히스 레저는 으로 꽤나 성대한 할리우드식 인사를 보냈던 배우다. 그는 예쁜 미소년들이 넘쳐나는 스크린에서 한 마리 도도한 젊은 수사자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또래 소녀들의 심장으로 빠르게 돌진해왔다. 하지만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잇는 청춘스타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선택은 같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고, 테리 길리엄의 나 리안의 등을 거치면서 진지한 배우의 길로 스스로를 다져나갔다. 그렇게, 안타깝게도 유작이 되어버린, 까지 히스 레저는 할리우드를 이끌 다음 세대의 대표주자라고 해도 이견이 없을 단단한 배우로 커가고 있었다. 그런 귀한 배우가 죽었다.

물론 전화를 건 그도, 메신저로 말을 걸어온 그녀도, 블로그의 주인들도, 히스 레저란 배우의 열성팬이 아닐지 모른다. 어떤 이는 그의 영화를 한두 편쯤 보았을 것이고, 어떤 이는 의 애잔함이 강렬하게 남았을지 모르고, 그중 누군가는 삶을 뒤흔들 순간을 그의 영화에서 발견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히스 레저의 죽음을 둘러싼 이 집단적 허무의 공기는 한 귀한 배우를 잃어버린 영화팬들의 슬픔만으로 빚어진 건 아닐 것이다. 1979년 생. 아직 서른도 되기 전에 떠난 청년의 죽음 앞에서, 많은 이들은 동시에 죽음의 선연한 존재감과 그들이 떠난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불현듯 실감했을 것이다.

배우는 그런 거다. 그저 이 땅에 왔던 한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등장이 주목받은 것 이상으로 한 배우의 부고가 전세계로 빛의 속도로 퍼질 때 그 갑작스런 퇴장이 만들어내는 파장도 엄청난 것이다. 공인, 이라는 말은 음주운전 뉴스에 써먹기 위해 탄생한 말은 아닐 것이다. 픽션의 세상에서 은밀하게 단독자로서 한 배우와의 추억을 공유했던 관객은 이제 그의 죽음을 안고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 리버 피닉스를, 장궈룽(장국영)을, 이은주를 떠나보내며, 스무 살을 살아내고, 서른을 통과하고, 마흔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새해 벽두부터 날아든 이런 소식은 참으로 버겁다. 떠나는 이들에게 물어볼 수 없어서 단정지을 수 없겠지만, 모든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더욱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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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겠니

“어떻게 하면 너를 끊을 수 있을지 알 수 있다면 좋겠어”(I wish I knew how to quit you). 에서 잭이 에니스에게 던졌던 그 말처럼. 알고 싶다, 정말로. 어떻게 또 너를 떠나보낼 수 있을지를. 아니 이 갑작스러운 이별들을 감당하고 또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물론 어쨌든 살아내겠지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그렇듯, 예전에도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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