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지금은 재정경제부가 된 재정경제원을 취재하던 1996년의 경험담입니다. 그해 여름 재경원은 상속세법 손질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야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지만, ‘가진 이’들은 특히나 민감한 게 바로 상속세입니다.
당시 40%였던 상속세의 최고세율을 왜 미국이나 일본처럼 50% 이상으로 높이지 못하느냐고 고위 당국자에게 물었습니다. 부의 지나친 세습을 막고 분산을 촉진하라는 법 취지도 들이댔습니다. 그러자 돌아온 답은 이렇습니다. “정형, 쉽게 생각하지 마. 상속세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법이야.” 상속세와 자본주의의 지탱이라니, 다소 뜬금없다는 표정을 짓자 이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무엇인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게 있어야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까. 너무 많이 거두면 생산성 향상은 기대하기 어려워.”
그의 말을 ‘부자들을 위한 변명’쯤으로 흘려버릴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사람들의 행동방식의 본질적인 어떤 측면을 세금으로 설명한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확실히 우리에겐, 무언가를 그것도 좀더 많이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본능이 내재돼 있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아들 재용씨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도 이런 부모의 DNA가 과도하게 작용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달랑’ 16억원의 증여세만 물고 매출 152조원(2006년 기준)의 ‘삼성 제국’을 물려주는 도박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리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도박은 결국 ‘화’(禍)를 불렀습니다. 제국을 유지하고 물려주는 데 갖은 편법과 불법을 사용하다 마침내 둑의 구멍이 터졌습니다. 이건희 부자는 이제 검찰이나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을지도 모르는 처지로 내몰렸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건희 회장 같은 부정(父情)만 존재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부(富)가 아닌 전혀 다른 걸 물려주고 싶어하는 이런 자식 사랑은 어떻습니까?
지난 10월 말 김용철 변호사를 만나 삼성을 고발하는 양심 고백을 들을 때의 경험입니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삼성에서 누릴 만큼 누렸을 텐데 왜 힘든 길을 선택하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이러저런 설명을 했지만, 유독 이 대목이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삼성에서 일하는 동안) 가정을 잃었다. 아이들이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검사 때는 존경을 받았는데. 삼성을 거치며 양심을 잃었다.”
김용철 변호사는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존재가 되지 못했던 자신을 아파했습니다. 이제는 그 아이들에게 양심을 지킨 정의의 인간상을 물려주고픈, 그래서 ‘당당한 아버지’로 돌아가고픈 바람을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그 길이 비록 가시밭길이 될지라도. 이젠 검찰 수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들어가는 김 변호사의 모습을 아마도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지켜볼 겁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새삼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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