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별다른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웃기 위해 TV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저절로 무릎을 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연출이 분명한데도 화면 속의 상황이 너무나 그럴듯해 허구를 보는 것인지 실제를 보는 것인지 헛갈리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어떤 때엔 그 감각적인 압축과 촌철살인의 풍자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현실을 일깨워주기까지 합니다.
SBS 에서 인기를 끌었던 코너 ‘회장님의 방침’도 그런 사례일 겁니다. 무대의 등장인물은 한 증권회사의 사장과 부하직원인 말 부장, 김 과장, 김 대리 등 네 명입니다. 이들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회장의 지시사항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행하며 관객과 시청자를 웃깁니다. 왜 수행하냐고요? ‘회장님의 방침’이기 때문입니다. 회장님은 이들의 뒤에서 커튼에 가려진 채로 부하직원들의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내려다봅니다.
지시사항이란 이런 것들입니다. 1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말 부장은 경마장으로, 김 대리는 회사 구내식당으로 가랍니다. 회장님이 기르던 개가 죽자 10만원의 경조비를 냅니다. 어처구니없는 지시에 말 부장과 김 대리는 “왜, 무엇 때문에”라고 항변하지만, 돌아오는 사장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회장님의 방침일세.” 그 회장님의 방침은 사장의 ‘위협’을 통해 관철됩니다. “회사 잘리면 애기 돌반지라도 팔 거야?” “나이 마흔에 알바 할 거야?” “밀린 월세는 냈어?” 사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꼬리를 내리고 아부 경쟁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 TV 속의 회장님이 화면 바깥으로 튀어나온 듯한 느낌에 빠집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지시를 요약해 극소수 핵심 간부들에게 전하는 ‘회장 지시사항’ 문건을 보니 그렇습니다. 베일에 가렸던 이 회장의 지시를 담은 발언록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시사항 중에는 이런 것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선대 생가가 있는 지역이 수재를 입었으니 피해를 알아보고 지원 방안을 마련하랍니다. 변호사·판사·국회의원 중에서 현금을 주기가 곤란한 이에겐 대신 호텔 할인권을 건네라거나, 엄격한 검사·판사의 경우 와인을 주면 효과적이니 따로 조사하랍니다. 로비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지시한 셈입니다.
삼성의 비자금을 양심 고백한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는 “이 지시사항은 구조본 고위 임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회람되며, ‘헌법’으로 간주돼 그 이행 상황이 상세하게 회장에게 보고된다”고 말합니다.
개그 프로그램 ‘회장님의 방침’의 선견지명이었을까요? 이 코너는 마지막에 객석의 펼침막을 비쳐주며 끝을 맺습니다. 펼침막의 글귀는 이렇습니다. “회장님의 방침은 곧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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