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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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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등록 2007-08-03 00:00 수정 2020-05-03 04:25

▣ 김규항 발행인

여전히 나에게서 “김건, 4학년 맞아?” 소리를 듣는 걸 보면 막내는 막내인데, 제 누나 없이 나와 둘이만 어딜 가거나 할 때는 아주 분위기가 달라져서 제법 반듯한 대화를 하게 된다. 어제도 그랬다. 제 생일에 ‘바이오니클’(블록)을 하나 더 사달라고 했던 걸 사주지 않은 일을 김건이 다시 꺼낸 게 시작이었다. 길게 끌 이야기가 아니다 싶어 “하나도 못 가진 아이들도 있는데 그 정도에 만족하는 게 어때?” 했더니 김건은 깜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 말이 맞아” 한다.

건이의 신선한 관점

녀석의 태도가 조금은 뜻밖이라, 또 그동안 생각이 얼마나 컸나 궁금하기도 해서(실은 얼마 전 학교에서 ‘최우수 토론상’이라는 걸 받아왔는데 다들 조금은 ‘어찌된 일인가’ 하는 중이다) 말을 이어보았다. “어떤 아이들은 굶는데 어떤 아이들은 먹을 게 남아버리잖아. 하느님은 어떤 아이가 더 마음이 아프실까?” “음… 부자 아이들.” “부자 아이들?” “응.” “설명해볼래?” “하느님은 사람이 다 평등하게 살 줄 아셨을 것 아냐. 그러니까 하느님은 굶는 아이들 생각 못하고 음식을 버리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프실 거야.” “음.”

‘가난한 아이들’이라는 정답지를 준비했던 나로선 자못 신선한 관점이었다. “아빠가 예수님 이야기 하나 해줄까?” “응.” “예수님이 회당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걸 보고 있었어. 부자들이 거들먹거리며 많은 돈을 헌금통에 넣고 가는데 어떤 가난한 아줌마가 얼굴이 발개져서 동전 한 개를 넣었어. 예수님이 그 아줌마가 누구보다 많이 냈다고 말했어. 왜 그랬을까?” “응, 부자는 큰돈을 냈지만 자기가 가진 걸로 보면 조금만 낸 거 아냐? 아줌마는 동전 한 개를 냈지만 가난해서 자기 걸 거의 전부를 낸 거니까 더 많이 낸 거 아냐?” “김건, 괜히 토론짱이 아닌걸. 언제 그렇게 똑똑해졌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자 녀석은 금세 허리를 꺾으며 자지러진다.

“이건 예수님이 들려준 이야긴데, 어떤 농장 주인이 날품 일꾼을 구해 일을 시켰어. 그중엔 오후에야 일을 구해온 사람들도 있었어. 저녁에 품삯을 주는데 종일 일한 사람이나 오후부터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주는 거야. 당연히 종일 일한 사람들이 항의를 했지. 예수님은 그 주인이 옳다고 말했어. 왜 그랬을까?” “응, 조금만 생각해봐도 돼?” 김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후부터 일한 사람들도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잖아. 그래서 똑같이 준 거 아냐?” “그래. 그런데….” “틀린 거야?” “아니, 이런 건 수학 문제처럼 맞다 틀리다만 있는 게 아니야.” “히히.” “예수님은 아침부터 종일 일했든 오후부터 일했든 하루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은 같다는 거야.” “그렇구나.”

사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잖아? 두 사람이 일한 만큼 가지는 게 옳을까?” “아니.” “왜?” “예수님이 말한 것처럼 필요한 만큼 가져야 하니까.” “그래. 그런데 세상은 어떻지?” “안 그렇지 않아?” “그래. 세상은 예수님 생각이랑 많이 다르지. 그래서 아까 김건이 말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부자인 것만으로 하느님 앞에선 부끄러운 거야. 김건은 나중에 어떤 사람들 편을 들 거야?” “가난한 사람들.” “괴로운 일도 많을 텐데.” “괴로워도 그게 맞잖아.” “그래, 괴로워도 그게 맞지. 그런데 김건, 괴롭기만 할까? 기쁨은 하나도 없을까?” “아, 기쁨 있어!”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어제 승호(김건보다 네 살 적은 이웃) 문병 갈 때 내가 아끼는 카드 30장하고 왕딱지 5개 갖다주었는데 기분이 참 좋았어.” “덜 아끼는 걸로 골라 줄 수도 있었는데 망설여지지 않았어?” “망설여졌어. 그런데 주고 나니 몇 배 기분이 좋았어.” “망설이다가 그냥 덜 아끼는 걸로 주었다면 어땠을까?” “부끄러웠을 거야.” “아무도 모르는데?” “나한테 말야.” 녀석의 마지막 말에 뭉클했다. 아, 이런저런 지식과 교양과 사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막내 노릇하는 열 살짜리보다 못한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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