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도망

등록 2007-07-13 00:00 수정 2020-05-03 04:25

▣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우리 사무실에서 벌어졌던 에피소드 하나. 아들 녀석이 컴퓨터를 차지하고 앉은 그에게 물었다. “삼촌, 회사는 어디예요?” 녀석과 컴퓨터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그가 대답했다. “나는… 도망갔어.” 녀석은 귀찮게 하여 컴퓨터를 빼앗으려는 수작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으나, 사오정 같은 대답이 돌아오니 뻘쭘하여 되물었다. “예?” 이어서 똑같은 대답. “도망갔어.” “예?” “도망갔어. 회사 없어.” “예?” 이런 문답이 여러 차례 오갔다. 결국, 그가 녀석의 수작에 낚였다기보다는, 분명히 한국말로 했는데도 아이가 말을 못 알아들으니 무안하고 샐쭉해진 탓에,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도망갔어. 일 안 해. 너 해. 컴퓨터.” 녀석은 컴퓨터는 제쳐두고 내게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엄마, 도망간 게 뭐야? 삼촌이 도망갔대요.”

‘퇴직’할 수 없는 사람들

‘도망’이라면, 피하거나 쫓기어 달아나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그는 왜 도망쳤다는 것일까? 혹시 위급한 상황에 처했던 것일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천만다행 그건 아니고, 이주노동자들이 말하는 ‘도망’에는 독특한 의미가 담겨 있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퇴직하다’와 ‘도망가다’를 동의어로 쓰고 있다. 심지어 ‘도망가다’만 알고 쓰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황당한 한국어 오해는, 지난 1월에 죽었으나 아직까지도 그 망령이 살아 있는 ‘외국인산업기술연수생제도’가 남긴 유산이다.

연수제도에 따르면, 연수생은 회사가 망하거나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나지 않는 한, 회사를 옮길 수 없다. 그러니 여러 가지 이유로 회사를 견딜 수 없었던 연수생들은 관리업체에 ‘내게만 예외를 인정하여 회사를 옮길 수 있게 도와달라’고 뒷돈까지 줘가며 애원하고 매달렸다. 그런 애원도 안 통하면 어쩔 수 없이 달아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건 ‘퇴직’하고는 절대 차원이 다르다. 회사에서 아무리 폭행, 폭언, 괴롭힘, 지나친 착취와 저임금에 시달린다 해도 규정대로는 회사를 옮기기 어려우니 ‘도망’가서 살길을 찾아야 했고, 회사에 뭔가 시정을 요구했다가 미운털이 박히면 언제 비자를 박탈당하고 쫓겨날지 모르니 또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3년으로 제한된 기간 동안 충분히 돈을 벌지 못했는데 출국을 강요당하면 또 어쩔 수 없이 ‘도망’가야 했던 것이다. 연수생을 ‘도망’가도록 방치하면 이후 연수생 배정 인원이 줄어들어 손해보게 되는 업체들은, 나름대로 여권과 임금 압류, 협박과 회유 등 갖가지 방책을 동원해 ‘도망’을 막았으나, 이주노동자들은 여권도 버리고 임금도 버리고 울면서도, 자유를 찾아 ‘도망’가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주노동자들은 “도망가지 말고 일해” “도망간 놈은 돈 안 줘” “왜 도망갔어” “도망가면 퇴직금 없어”… 등과 같은 말을 수없이 듣고 살았으니 ‘도망’은 곧 ‘퇴직’이라는 슬픈 오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씁쓸한 분노가 치미는 현실이로다!

다행히 연수생제도는 폐지되고 고용허가제가 탄생하셨다. 그렇다면 이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노동3권’까지 보장한다는 고용허가제는, 과연 이주노동자에게 ‘도망’같이 독특한 방법 말고, 평범하게 ‘퇴직’을 선택할 자유를 인정하고 있을까? 오호, 통재라! 그런 일은 절대로 없으니 기대하지 말지어다. 고용허가제 또한 노동자에게 퇴직해 다른 회사로 옮길 권리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회사가 부도나거나 회사 쪽에서 일방적으로 기간 연장을 거부한 때와 같이 극히 우울한 경우에만, 3번까지 이동을 인정한다. 본인 의사에 따라 회사를 옮기고 싶다고 하면 영원히 한국에서 떠나라고 밀어버린다.

도망이라도 가서 사람답게…

이주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매인 신세다. 상상해볼지어다. 회사가 싫어 죽겠는데 떠날 자유가 없는 상황을.

옮겨 일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묶여 있을 수는 없다. ‘도망’이라도 가서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인정되는 그날까지, 이주노동자는 사오정이 될지언정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도망갔어요”라고 독특하게 말한들 그게 대수랴.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