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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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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여행

등록 2007-07-06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이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6월 달력을 넘기고 나니 코앞에 바싹 여름휴가 시즌이 닥쳤습니다. 이번 휴가 땐 어떻게 하지? 늘 준비엔 젬병인 자신을 탓해보지만 그렇다고 뾰족수가 나올 리 없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 몸을 짓누를수록 휴가, 특히 휴가 여행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일입니다. ‘익숙한 것과의 이별이자 낯선 것과의 만남’(, 공지영)이라는 표현의 ‘만남’에 방점을 찍기 전에 우선 떠난다는 것 자체로 홀가분해집니다. 일상 탈출은 몸과 마음을 들뜨게 하는 흥분제입니다. 미국의 작가 존 스타인벡은 여행을 두고 “마음을 들뜨게 하는 바이러스가 바람을 잡으면 길을 나설 만한 이유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달콤한 공상에서 깨고 나면 냉정한 현실이 막아섭니다. 얄팍한 지갑에다 빤히 예상되는 교통지옥, 닳고 닳은 바가지 상혼을 생각하면 기운이 빠집니다. 무엇보다 고만고만한 휴가 아이디어가 머리를 쥐어짜게 만듭니다. 휴가 뒤 일상으로 돌아와도 가슴 설레는 뿌듯함을 남겨줄 계획을 세우기란 좀체 힘든 일입니다.
저와 비슷한 고민에 빠진 이들을 위해 이 일곱 색깔 휴가를 귀띔합니다. 포인트는 ‘내 맘대로’입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제 하고 싶은 것을 즐기되 뭔가 독특한, 여름 탈출법입니다. 인터넷 서핑으로 허기를 채우는 클릭여행, 집 바깥 대신 김치 담그기에 뛰어든 역발상의 부엌여행, 그리고 뉴욕 골목골목을 쏘다니는 맥줏집 순례가 여기 있습니다. 거기에 폼나는 북극 빙하 트레킹까지…. 엉덩이가 연방 들썩거려지는 ‘노마드족’에서부터 무조건 뭉개고 싶은 ‘귀차니스트’들에게까지 두루 보탬이 될 겁니다.
개인적으론 이번 휴가를 위해 세워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느린 여행’(slow travel)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을 배반하고, 속도를 거스르는 여행 말입니다. 해보지 않았고, 자신이 없으니 도전이 분명합니다. 남해안의 섬에서든 강원도의 휴양림에서든 분주하게 돌아다니지 않고 느릿느릿 시간을 잊고 어슬렁거리고 싶습니다. 단 이틀도 좋고 사흘도 좋으니 휴대전화나 텔레비전 같은 전자기기와는 이별을 해야겠지요. 대신 가족의 손에 책 한두 권씩 들려 있기를 기대합니다. 깊은 밤 함께 책도 읽고, 조금 거창하지만 친구나 인생에 대해 얘기도 나눴으면 합니다.
그런데 컴퓨터와 텔레비전, 휴대전화에 거의 ‘중독’ 수준인 아이들이 이런 느림보 여행에 동의할까요? 아니 아이들은 둘째치고 제가 정말 느린 여행을 해낼 만큼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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