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시사넌센스] “공개 안해”의 예의바른 표현

등록 2007-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 느는 것은 담배다. 대한민국 정부가 국회의원들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초안을 공개하면서 문서 내용을 컴퓨터 모니터로만 보고 메모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시에 덥석 합격한 똑똑한 대통령이나 조기 유학에 성공해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박사 학위을 받은 통상 장관 수준의 강호 최고수라면 모를까, 모니터 화면 위에 뜨는 영어만 보고 500쪽 넘는 방대한 문서의 내용과 그 행간의 의미까지 꿰뚫어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정부는 결국 “문서 공개를 못하겠다”고 말하는 듯한데, “메모 금지는 말이 안 된다”라는 반발을 받아들여 메모는 할 수 있게 허용(!)했다고 한다. 과 의 4차원 개그가 난무하는 시대에 정부의 ‘쌍팔년’도 개그는 허무하다 못해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정부는 자신들의 헛삽질을 알고는 있을까.

“모를걸요, 아마.” 이승엽의 야구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32일 금식’ 발언으로 네이버 인기검색어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한 이태식 주미대사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 듯했다. 그는 방송인 손석희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은 사죄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외교부가 (자신의 발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도 안하고) 보도된 내용을 바탕으로 (사죄 표현이나 금식 제안은 정부와 무관하다는 식의) 입장을 표명했다”고 우겼다. 결국 삽질한 것은 자신이 아닌 주변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이를 집요하게 따져묻는 손씨 앞에서 이 대사의 발언은 자주 엉키고 꼬여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돼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어떤 잘못이 명백한 사실로 확정되기 전까지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는데, 상대가 무사 만루면 선동열이 아니라 선동열 할아버지가 와도 한두 점 주고 막는 게 세상 사는 이치다. 무리하게 삼진 잡으러 들어가다가, 스타일 세게 구겨지는 분들 가끔 계신다.

그게 누구냐고? 이주의 당첨자는 ‘잡아떼기’의 고수 국방부. 제주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겠다고 기회날 때마다 침 튀기며 강조해온 국방부가 “그런 사실이 없다”는 엉뚱한 해명 자료를 내놓고 말았다. 과정은 이렇다.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내려온 김장수 국방장관은 “여론조사 결과 반대가 많으면 건설계획을 취소하겠냐”는 질문에 “취소란 있을 수 없다”며 배를 째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현애자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5분 발언에서 “국방장관이 제주도민 동의가 없어도 해군기지 부지를 직접 선정하겠다”고 한 김 장관의 발언을 언급했는데. 닳고 닳은 국방부 공보실 직원들 반사적으로 이렇게 반응했던 것은 아닐까. “어! 저거 나쁜 얘기쟎아. 무조건 잡아떼!” 그리하여 나온 국방부의 해명 자료는 다음과 같다. “국방부는 제주도민의 의사에 반해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취지로 말한 적도 없으며, 지금까지 여러 차례 밝혀왔듯이 제주 해군기지는 제주도민의 동의를 얻어 추진한다는 것이 변함없는 입장임.” 물론…, 좋아하긴 이르다. 나중에 또 잡아뗄지 모르니.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 느는 것은 담배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