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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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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세대’ 혁명 뒤에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장기집권’ 하시나 몰아냈지만, ‘공생 관계' 타리크 라만이 집권
등록 2026-02-19 22:27 수정 2026-02-22 14:22
2026년 2월13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민족주의당 당사 앞 타리크 라만 당대표의 얼굴이 담긴 대형 펼침막 앞에서 지지자들이 총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6년 2월13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민족주의당 당사 앞 타리크 라만 당대표의 얼굴이 담긴 대형 펼침막 앞에서 지지자들이 총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젠제트(Gen Z·제트세대) 시위’로 셰이크 하시나 총리 정부를 무너뜨린 방글라데시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이 예상됐지만, 결과는 일방적으로 기울었다. 1971년 건국 이후 하시나 전 총리 집안과 함께 방글라데시 정치를 양분했던 칼레다 지아 전 총리의 아들 타리크 라만이 총리로 취임했다. 세상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공직 할당제’ 복원 판결이 청년들 분노케 했다

2024년 6월5일 방글라데시 법원은 하시나 전 총리 정부가 2018년 3월 ‘공직 할당제’를 폐지한 것은 부당한 결정이며, 이를 즉시 복원시키라고 명했다. 건국 직후 만들어진 공직 할당제는 독립전쟁에 참여한 유공자 몫으로 공직의 30%를 할당해주는 제도다. 독립유공자의 고령화에 따라 1997년엔 그 자녀까지, 2010년엔 손자녀까지 수혜 대상이 확대된 터다. 취업난 심화 속에 청년층을 중심으로 제도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2018년 3월 할당제 폐지 소송이 기각되면서 학생 시위가 번지자, 하시나 당시 총리는 발 빠르게 제도 폐지를 발표한 바 있다.

법원의 할당제 복원 결정이 나온 직후부터 수도 다카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분노한 청년들이 방글라데시 전역에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2024년 7월로 접어들면서 시위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무도한 정권은 폭력으로 맞섰다. 줄잡아 1400명의 시위대가 숨지고, 2만5천여 명이 다쳤다. 저항은 계속됐다. 그해 8월4일 대규모 시위대가 총리 관저를 포위했다. 총리실 쪽은 “하시나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했다. 그날 하시나 전 총리는 사임 연설도 없이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두 번째 인도 망명이다.

2024년 8월5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시위대가 셰이크 하시나 당시 총리의 사임 발표를 축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4년 8월5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시위대가 셰이크 하시나 당시 총리의 사임 발표를 축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두 집안이 나눠먹은 53년 방글라데시 정치

영국령 인도는 1947년 8월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와 무슬림 중심의 파키스탄으로 분할-독립했다. 파키스탄은 이란·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댄 서파키스탄과 벵골만에 자리한 동파키스탄으로 구성됐다. 인도 영토를 사이에 두고 1600㎞ 이상 떨어진 두 지역은 언어도 달랐다. 1952년 2월 파키스탄 정부가 서파키스탄에서 쓰는 우르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라고 명하자, 벵골어를 쓰는 동파키스탄 쪽이 거세게 반발했다.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1970년 11월 초대형 사이클론 ‘볼라’가 동파키스탄을 휩쓸었다. 줄잡아 30만~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사상 최악의 재난이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신속한 복구도, 세계 각국이 보내온 원조 물자 분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쌓인 분노가 폭발했다. 한 달 뒤 총선이 치러졌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이끈 아와미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압승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라만은 이듬해 초 ‘동파키스탄 독립’을 전격 선언했다.

동파키스탄으로 파병된 서파키스탄군은 무차별적 폭력을 휘둘렀다. 숱한 목숨이 스러졌다. 파상공세에 밀린 동파키스탄 독립군은 인도 국경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서파키스탄군이 국경 일대를 공습했다. 결국 1971년 12월 인도가 나서 서파키스탄군을 제압했다. 독립 선언 직후 체포됐던 라만은 1972년 1월 ‘벵골인의 나라’ 방글라데시로 귀국해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셰이크 하시나는 라만의 딸이다.

1975년 8월15일 방글라데시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했다. 라만은 사저에서 일가족과 친지 등 40여 명과 함께 살해됐다. 사건 당시 유럽을 순방 중이던 셰이크 하시나는 일행과 함께 인도로 망명했다. 군부 내부의 암투와 혼란이 한동안 이어졌다. 결국 독립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인 지아우르 라만이 세력을 규합해 1977년 4월 대통령이 됐다. 그는 1978년 9월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을 창당했다.

1981년 5월 방글라데시 제2대 도시인 남동부 치타공을 방문 중이던 지아우르 라만도 경호원 등과 함께 암살됐다. 그의 부인이 뒤를 이어 민족주의당을 이끌게 됐다. 칼레다 지아 전 총리다. 그 무렵 아와미연맹 대표로 선출된 하시나 전 총리도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1982년 3월 지아우르 라만 암살의 배후이던 후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지아 전 총리의 민족주의당과 하시나 전 총리의 아와미연맹이 반군부 투쟁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1990년 11월 반군부 시위가 방글라데시 전역으로 번졌다. 에르샤드 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시도했지만, 군부의 반발로 무위에 그쳤다. 에르샤드는 1990년 12월 대통령직 사임 뒤 체포됐다.

2026년 2월12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총선 개표소에서 선거관리 요원들이 개표를 위해 투표함을 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6년 2월12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총선 개표소에서 선거관리 요원들이 개표를 위해 투표함을 열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아-하시나, 엎치락뒤치락 적대적 공생

1991년 2월 치른 총선에서 민족주의당 주도의 선거연합은 전체 300석 가운데 140석을 얻었다. 아와미연맹 쪽은 88석을 얻었다. 칼레다 지아는 방글라데시 사상 첫 여성 총리가 됐다. ‘지아-하시나’ 간 질긴 악연이 본격화했다. 아와미연맹의 보이콧 속에 1996년 2월 치른 총선에서 민족주의당은 의석을 278석까지 끌어올렸다. 당시 투표율은 단 20%에 그쳤다. 야권의 반발 속에 전국적인 총파업까지 벌어지면서 결국 같은 해 6월 조기총선이 실시됐다. 약 75%의 투표율 속에 아와미연맹은 146석을, 민족주의당은 116석을 각각 얻었다. 이번에는 셰이크 하시나가 총리가 됐다.

2001년 10월 총선에선 민족주의당이 193석을 얻어 지아 전 총리가 다시 집권했다. 2008년 12월 총선에선 아와미연맹이 230석을 얻으며 하시나 전 총리가 다시 권좌에 올랐다. 이후 치른 세 차례 총선에서 민족주의당의 보이콧 속에 하시나 전 총리가 연임을 이어갔다. 지아 전 총리는 2018년 2월 부패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에 처해졌다. 이후 엇비슷한 혐의가 더해지면서 형량도 계속 늘어났다. 그는 하시나 전 총리 정권이 무너진 직후인 2024년 8월5일 석방됐다.

하시나 정권 붕괴 뒤 구성된 과도정부는 경제학자 출신인 무함마드 유누스가 이끌었다. 그는 빈곤 퇴치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다. 과도정부는 2026년 2월12일 차기 총선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정당 등록이 취소된 아와미연맹은 선거 참여 자체가 금지됐다. 하시나 전 총리는 반인도적 범죄 등의 혐의로 2025년 11월 열린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노환에 시달리던 지아 전 총리는 상태가 위중해졌다. 2008년부터 영국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이어온 그의 장남 타리크 라만이 급거 귀국했다. 지아 전 총리는 아들의 귀국 5일 뒤인 2025년 12월30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

타리크 라만은 지아 전 총리의 두 차례 집권기(1991~1996년, 2001~2006년) 때 막후에서 실권을 휘둘렀다. 그를 망명길로 이끈 건 2004년 8월 발생한 ‘다카 수류탄 사건’이다. 당시 야당이던 아와미연맹이 주최한 대규모 행사장에 수류탄 여러 발이 날아들어 24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라만이 그 배후로 지목됐다. 그는 수사망이 좁혀오던 2008년 9월 신병 치료를 내세워 영국으로 출국했다. 이후 그는 귀국할 때까지 지아 전 총리를 대신해 민족주의당을 ‘원격 운영’해왔다. 방글라데시 법원은 2018년 10월 라만을 다카 수류탄 사건의 주모자로 규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하시나 정권 몰락 직후인 2024년 8월 말 ‘절차적 위법성’을 이유로 1심 선고를 뒤집고 무죄 판결을 내렸다.

2024년 2월13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청소 노동자가 선거 홍보물이 내걸린 거리를 쓸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4년 2월13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청소 노동자가 선거 홍보물이 내걸린 거리를 쓸고 있다. AP 연합뉴스


혁명의 과실은 결국 기득권 정당 BNP에

아와미연맹이 배제된 선거판은 민족주의당과 이슬람주의 정당 ‘자마트 에 이슬라미’(자마트) 양강 체제로 재편됐다. 투표일을 불과 두 달 남짓 앞둔 2025년 12월12일 하시나 정권 붕괴를 이끌었던 학생운동단체 ‘인킬라브 만차’(혁명 플랫폼) 대변인을 지낸 샤리프 오스만 하디(당시 32살)가 다카에서 오토바이를 탄 괴한 두 명한테 총격을 당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심각한 뇌손상 치료를 위해 12월15일 싱가포르로 이송됐지만, 사흘 뒤 끝내 숨졌다. 하디는 다카 9번 선거구에서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혁명 플랫폼’이 주축이 돼 창당한 신생정당 국민시민당(NCP) 쪽은 즉각 애도를 표했다. 국민시민당 쪽은 12월28일 자마트가 주도하는 선거연합에 동참한다고 발표했다. 외세(인도)와 기득권(아와미연맹-민족주의당)에 맞서려면 과감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보수적 이슬람주의자인 샤피쿠르 라만 자마트 대표는 ‘출산과 수유’를 내세워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노골적으로 밝혀왔다. 자마트 주도의 선거연합 참여를 두고 국민시민당 내부에서 격한 반발이 쏟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지도부 일부는 집단 탈당하기도 했다. 판세는 막판까지 엎치락뒤치락했다. 현지 일간 다카트리뷴은 2026년 2월9일치에서 “최신 여론조사 결과 자마트가 43.9%의 지지율 속에 105개 선거구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민족주의당은 44.1%의 지지율을 얻으며 101개 선거구에서 앞서고 있다. 75개 선거구는 여전히 박빙이며, 여타 정당이 19개 선거구에서 우세한 상태”라고 전했다.

2월12일 총선이 치러졌다. 민족주의당은 전체 300석 가운데 209석을 얻으며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자마트는 68석을 얻었다. 30개 지역구에 후보를 낸 국민시민당은 단 6석을 얻는 데 그쳤다. 타리크 라만은 2월17일 부모의 뒤를 이어 제11대 방글라데시 총리로 취임했다. 아와미연맹의 장기집권 체제를 무너뜨린 ‘젠제트’ 혁명의 과실을 ‘적대적 공생’ 관계이던 민족주의당이 오롯이 차지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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