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공멸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규항 발행인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를 절차적 차원으로 보는가, 분배나 계급 문제를 살펴보는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몰라보게 진전된 건 사실이다. 이젠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제한당하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가 오히려 더 퇴보한,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퇴보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일까? 바로 아이들이다.

짜증스럽고 공격적인 아이들

온 나라가 병영이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 느린 시간, 어른이 보기엔 별 실용적 의미가 없어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어떤가? 그들의 삶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과 다를 바 없다. 과거 방식으로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는 더 이상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의 미래’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구속은 전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그 가공할 인권 탄압을 ‘교육 문제’라 부른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면서 무한경쟁 체제로 변화했다. 돈과 물질적인 가치가 삶을 지배하게 되었고, 군사독재 시절에도 이어지던 공동체 정신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우애와 연대의 심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직격탄을 맞은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젖을 떼자마자 경쟁의 바다에 던져지고 오늘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람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기른다. 옛날엔 보수적인 부모도 “동무들과 서로 돕고 양보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이라는 부모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동무는 경쟁자이며, 경쟁자를 돕고 양보하라는 건 패배하고 도태되라는 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이 있는 집에 가보면 오늘 아이들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사춘기의 반항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고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부모에게 짜증을 내고 종종 공격적이다. 부모들은 별 도리가 없다. 오늘 한국의 부모와 자식은 엘리트 체육에서 선수와 코치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선수의 성적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코치들은 선수의 인간적 면모에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다. 설사 문제가 보인다 하더라도 이미 과도한 훈련에 심신이 포화상태에 이른 선수에게 그런 부분까지 요구한다는 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이 미친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한국의 부모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이 무한경쟁의 바다에서 내 아이가 어찌 살아갈지 근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비난하겠는가? 나는 다만 아이들을 이렇게 키울 때 우리의 미래가 어떨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과연 이 아이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우애나 연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이 소비나 물질적 축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바로 그 순간들이라는 걸 안다. 우리가 그걸 아는 건 우리가 아이일 때 누린 자유롭고 느린 시간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자란 부모의 삶 덕이다. 그런데 날 때부터 경쟁의 감옥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적 외엔 눈을 감는 부모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행복을 알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무려 20여 년의 인생을 수인처럼 살고 난 다음 무엇이 행복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든 지든 마찬가지다.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하고 진보운동이 쇠락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보다 더 암울한 미래가 우리 아이들을 통해 준비되고 있다. 아이들을 이렇게 키운다면, 보수와 진보가 한 몸이 된 이 미친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공멸’뿐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