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드러진 들풀 사이에서 겨울을 버텨낸 상추가 수줍게 웃고 있다.
날이 좋았다. 겨우내 입었던 두툼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벗고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반소매 윗옷에 바람막이를 걸치고 차에 올랐다. 드디어 올해 농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그런데, 덥다. 외기 온도 계기판에 ‘20'이란 숫자가 보인다. 허, 봄이 한창이다.
밭에 도착하니 먼저 온 막내가 퇴비를 나르고 있다. 지난해 20㎏ 퇴비 100개를 호기롭게 옮긴 뒤 사나흘 앓았던 기억이 새롭다. 계속 생사가 궁금했던 상추부터 만나야지. 상추밭으로 먼저 다가섰다. 터널을 만들어준 비닐을 벗겨냈더니 안에서 봄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연초록 풀이 잔디처럼 빼곡하다. 상추는 살았을까? 오종종한 들풀 사이로 상추 한 포기가 수줍게 웃고 있다. 오, 생명의 위대함이란. 자세히 살펴보니 저만치 좀더 작은 상추 한 포기가 더 있다. 겨울을 버텨낸 상추가 마냥 대견했다.
낡은 손수레에 한 번에 퇴비를 세 포씩 실었다. “왜 이렇게 무겁지?” 막내가 갸웃한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고랑마다 한 포씩 퇴비를 옮기고 나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말라붙은 들풀을 갈퀴로 박박 긁어내고, 삽날을 세워 퇴비 포대를 열었다. 잘 부숙된 퇴비도 있지만, 물이 스며들어 축축한 것도 있다. 무겁다고 느낀 게 아니라, 스며든 물 때문에 실제 무게가 더 나간 게다.
올해 첫 삽질이 시작됐다. 퇴비를 넣어 한 고랑 뒤집고 나니 숨이 차올랐다. 막내는 벌써 세 번째 고랑을 뒤집고 있다. “잠깐 쉬고 하세~.” 일단 도시락부터 열었다. 왁자지껄 흥청댔던 지난해와 달리, 단출하게 둘뿐인 ‘시농제’다. 주말에도 출근한 밭장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한술 뜨고 시금치를 파종한 밭으로 가봤다. 많지는 않지만 푸릇푸릇 여린 시금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월동시금치 맛은 ‘최고’란 말로도 부족하다. 여러해살이 풀인 부추는 따로 반 고랑 심어놨는데, 올해는 초세가 예년보다 왕성하다. 초여름 비 오는 날 부추전 부쳐 동무들과 막걸리 나눌 생각에 벌써부터 반가웠다.
오이와 호박 지주대는 낡아서 흐물흐물하다. 다시 만들어 세워줘야 할 것 같다. 빨리 먹을 잎채소는 해 잘 드는 쪽에 모종을 넣고, 오래 먹을 건 해가 덜 드는 쪽에 파종해야겠다. 올해는 방울토마토를 더 심어야지. 지난해 만든 바질밭에 제법 씨앗이 떨어졌을 테니, 거긴 뒤집지 말고 기다리자. 농사지을 생각에 흐뭇해졌다.
다시 삽을 잡고 밭을 뒤집기 시작했다. 막내는 지난주에도 혼자 와서 미리 두 고랑을 뒤집어놨다. 퇴비 넣어 뒤집은 밭을 갈퀴로 슬슬 긁어 평평하게 만들고 나니 예뻤다. 삽질 빠른 막내가 뒤집은 고랑도 갈퀴로 평탄화했다. 스물아홉 고랑 중에 벌써 열 고랑을 뒤집었으니, 나머지는 차차 동무들과 함께 하면 되겠다.
3월 말로 다가선다. 해마다 이맘때면 씨감자를 넣는다. 수확량 시시하다고 감자를 안 넣으면, 5~6월 소담한 감자꽃을 만날 수 없다. 손 털고 일어서려다 홀로 자경 중인 동무의 마늘과 양파가 떠올랐다. 마늘도 그렇지만 양파 기세가 등등하다. 올해 첫 고기를 굽는 날 몇 개 서리해 곁들이면 그만이겠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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