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2년 만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한 원혼들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났지만, 님의 침묵은 끝이 없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외쳐왔던 그분이 ‘아버지의 통치 하에’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계시다. 그분은 아시는 것이다. 묵비권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는 기술이라는 것을. 이미 2004년에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법적으로 정리가 난 사안”이라고, 2005년에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 발표에 “가치 없는 모함”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도, 민주노동당 대변인도 좌우합작 한목소리로 그분의 발언을 권유했지만, 그분의 침묵은 끝이 없다. 그분의 2007년 수첩에는 ‘침묵은 금이다’라고 쓰여 있나 보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그분에게 사과를 요구한 유족들의 심정이 아닐까.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한 구절처럼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싶다. 부디, 한 말씀만 하소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분의 침묵이 자발적 침묵이라면, 강요된 침묵에 할 말을 잃은 사람도 있다. 인혁당 사법살인 피해자 8명 중 한 명인 도예종씨의 부인 신동숙씨의 오래된 침묵이 가슴을 때린다. 신씨는 32년 만에 남편의 누명이 풀리던 날 어렵게 말했다. “남편이 죽은 뒤 빨갱이 오해를 살까봐 아무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혼자 집에 틀어박혀 사느라 말을 제대로 못해봐서 지금은 말도 똑 부러지게 못하는 사람이 됐다.” 말도 똑 부러지게 못하는 사람이 됐다! 이렇게 세상에는 분통 터지는 침묵도 있지만 진정으로 고통스러운 침묵도 있다. 무죄 선고가 끝나자 유족들이 했다는 한 말씀, “아이고, 분해!” 한 말씀에 한 세월이 들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음을 아는 자들은 이렇게 살아서 말한다. 아니 죽은 자가 살아서 말한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고. 역시나 8명의 영정 앞에 ‘님의 침묵’의 한 구절을 바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부디….
그들의 희생으로 할 말은 하는 세상이 됐다. 참으로 할 말이 많은 분이 있다. 별로 안 듣고 싶은 ‘신년담화’를 꼭 보고 싶은 시간에 해서 국민에게 ‘뒷담화’를 당하신 그분 말이다. ‘신년연설’에 이어서 ‘기자회견’까지 이어진 님의 기나긴 수다는 깜짝 고백으로 이어졌다. “(차기 대통령의 자질로) 많은 사람들은 경제라고 하는데, 경제 정책의 차별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경제 정책에 무슨 차별성이 있느냐.” 남들은 명바기 오빠를 겨냥한 말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솔직한 커밍아웃으로 들린다. 딴나라당이 하나 열린뚜껑당이 하나, 경제나 갱제나 똑같은 거시기라는 말씀, 허약한 정치가 신성불가침의 경제에 덤비기 힘든 시대라는 말씀. “사회복지, 사회투자가 확실한 차별성이 있다.” “역사적 차별성” 운운했지만, 사족처럼 들린다. 그러니까 “좌파 신자유주의”에 이은 두 번째 커밍아웃, 어차피 누가 해도 신자유주의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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