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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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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새’는 희망의 기회

등록 2007-01-12 00:00 수정 2020-05-03 04:24

처음 어떻게 버릇 들이냐에 따라 우수고객도 되는 기피고객도 되고…그러니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엉망인 것도 새롭게 만들 수 있겠네

▣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열쇠가 나하고 원수진 게 분명하다. 오늘도 사무실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넣어둔 책상서랍 열쇠를 찾느라 한 20분간 씩씩거렸다. 연말에 부서 이동하면서 책상을 옮길 때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게 화근이었지만, 평소에도 집 열쇠, 여행가방 열쇠 등 매일 쓰는 갖가지 열쇠들을 찾느라 인생의 반을 허비하고 있다.

건망증 때문이 아니다. 다른 물건은 어디에 두었는지 바로 생각나는데 열쇠하고만 엮이면 난감한 일이 생기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는 세 살 때부터 열쇠를 잃어버리면서 어린 시절 열쇠와 좋지 않은 관계가 형성되어 좋지 않은 습관을 만든 것 같다.

옛 동네 비디오 가게 주인은 믿지 못할 일

처음에 어떤 습관을 들이느냐의 중요성은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나와 비디오 가게의 관계 형성 과정이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 나는 비디오 반납을 연체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하도 제때에 안 갖다주니까 새 영화를 빌려오면 가게 주인이 친히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수거해갈 정도였다. 실제로 홍익대 앞에 살던 2년 동안 비디오 대여료보다 연체료를 훨씬 더 많이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동네에서는 몇 년간 단 한 번도 연체한 일이 없이 기일 내 반납하고 있다. 연체는커녕 새 영화는 반납일 전에 돌려줘서 주인 아줌마에게 ‘우수고객’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홍대 앞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절대 믿지 못할 일이다.

같은 사람이 비디오 반납이라는 똑같은 일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다른 행동을 보일 수 있을까, 처음에는 나도 의아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비디오 가게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홍대 앞에서는 비디오를 빌리기 시작할 때 처음 몇 번을 늦게 갖다주면서 그렇게 버릇이 들어버렸고, 지금 동네에서는 처음 몇 번을 날짜에 맞춰 반납했더니 또 그렇게 굳어버린 거다. 한마디로 처음에 어떤 식으로 관계가 형성되었는가의 문제였다.

원고 마감도 마찬가지다. 맨 처음 두세 번만 잘 지키면 그 다음부터는 마감일을 넘기는 일이 거의 없다. 몇 해 전 가톨릭 에 고정 칼럼을 쓴 적이 있었는데 쓸 동안 한 번도 마감일을 넘긴 적이 없었다. 담당 수녀님은 수십 년 넘게 원고청탁을 하는데 이렇게 ‘착실한’ 필자는 없었다며 칭찬하셨다. 반대로 원고는 지난 몇 달간 한 번도 기자가 원하는 마감일을 지킨 적이 없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원고 마감일이 모두 해외출장 기간이거나 장거리 비행기 이동 중이어서 제때 맞추지 못했더니 그게 그렇게 버릇이 들었는지 매번 늦어지고 있다.

비디오 가게나 원고 마감 경험으로 볼 때 나는 언제나 비디오를 늦게 반납하고 원고 마감일을 넘기는 사람이 아니라 초기에 어떻게 습관을 들이고 어떤 관계를 형성했느냐에 따라 우수고객, 착실한 필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정녕 희망의 발견이다. 이 말대로라면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할 때는 여태껏 불만족스럽거나 엉망이던 관계도 전혀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 학년, 새 직장, 새집, 새해, 새 자가 들어간 모든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호흡을 하고 ‘반으로!’

2007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날은 마치 새 일기장의 첫 장을 쓰는 것처럼 무척 설레고 살짝 두렵다. 이 설렘과 두려움의 정체는 새해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는 바람은 아닐까? 나 역시 새해, 새 마음으로 묵은 습관은 버리고 전혀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바르르’하는 성질 죽이기다. 자아비판을 하자면 나는 정의를 사수하거나 약자를 대변하기 위한 것도 아니면서 제 성질에 못 이겨 벌컥 화내는 버릇이 있다. 진짜 크게 화가 나면 오히려 차분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별것도 아닌 일로 바르르 작은 화를 내곤 한다. 속으로 꽁하고 있다가 뒤통수 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왜 화가 났는지 확실히 알려서 같이 풀어버리고는 바로 잊어버리는 게 뒤끝도 없고 좋은 거라고 스스로 변호해보아도 화내고 나면 언제나 찜찜하고 기분이 나쁘다.

명리학을 공부하는 친구에게 재미 삼아 사주를 보았더니 글쎄 내가 워낙 강한 불 기운을 타고났다는 거다. 四柱八字, 즉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네 가지 기둥과 8자의 기운이 있고 그 8자는 화, 수, 목, 금, 토의 다섯 기운이 골고루 섞여 만들어지는데 나는 그 8자 중에 불기운이 자그마치 4개나 있단다. 속에 활활 타는 큰 불을 가졌으니 에너지가 남보다 많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웬만한 내공으로는 화를 다스리기가 어려운 단점도 있다는 거다.

음, 그렇다면 내공을 쌓으면 된다는 건데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세상에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란 없는 법. 그래서 올해의 목표를 ‘화내는 빈도와 강도를 반으로 줄이기’로 정했다. 사무실 책상 앞에도 ‘반으로!’라고 크게 써서 붙여놓았다. 직장 동료들이 남들은 사랑도 일도 두 배로 열심히 하고 돈도 두 배로 벌고 싶다는 새해 결심을 하는데 왜 나는 반으로냐며 의아해한다. 속도 모르고.

다행히 새해 들어 오늘까지는 누구한테도, 단 한 번도, 장난 삼아서라도 화를 내지 않았다. 사실 오늘 아침 회의 때 직장 상사가 엉뚱한 얘기를 해서 화를 낼 뻔했는데 그 순간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속으로 ‘반으로!’을 외쳤더니 잘 넘어갔다.

아직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2007년 새해와 내 성질과의 좋은 초기 단계 관계 형성이 시작된 것만은 분명하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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