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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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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이 가득한 배

등록 2007-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중세 시인이 읊은 ‘바보들이 흔해빠져도 이상하게 볼 것 하나 없다’…바보가 되지 않으려 아이들을 진짜 바보로 만드는 교육을 조롱하네

▣ 김진송 목수·문화평론가

콜럼버스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한(발견인지 아닌지는 논란이 있지만, 일단) 지 2년 뒤인 1494년. 세파의 거센 풍랑 속으로 또 하나의 배를 띄워보낸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바스티안 브란트. 지금의 스위스 바젤이란 곳에서 그가 띄운 배의 이름이 ‘바보배’였다. 바보들의 천국 ‘나라고니아’로 향하는 배 안에서 브란트는 길고 긴 항해일지를 기록하는데, 바보들이 가득한 배 안의 풍경들을 노래한 글이 바로 이다.

100편이 넘는 시들에는 중세 말 유럽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바보배의 항해사를 자임한 브란트는 사람들의 탐욕과 무지와 어리석음에 시종 혀를 끌끌 차면서 조롱을 날리고 짐짓 점잖게 훈계를 하며 바보배의 키를 잡고 있다. 그의 시 한 구절.

‘아내는 남편을 닮고,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네.

수도원장이 주사위를 빌려주고,

승려들이 화투짝을 돌리는 짝일세.

몹쓸 가르침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는

범절도 명예도 간곳없네.

그건 말일세, 아비 노릇이 글러먹어서 그런 거라네.

아내는 남편이 하는 본을 따르고,

아들내미는 아비가 하는 모양을 따르고,

딸내미는 어미와 판박이가 되는 법일세.

그러니 세상에 바보들이 흔해빠져도

이상하게 볼 것 하나 없다네.’

근엄한 그리스도교도인 브란트의 눈에 세상은 온갖 거짓, 사기, 협잡, 나태, 탐욕, 부패가 판을 치는 곳이다. 중세의 종교적 권위로 무장한 그에게는 중세 말의 사회가 적그리스도로 가득한 위기의 세상이었다. ‘어느 세상인들 다를 것이 있겠는가?’라는 체념이 넘치는 우리 사회에 그가 나타나 바보배를 띄운다면 거기에 실려가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중세와 현대의 풍경이 다를지라도 ‘세상에 바보들이 흔해빠져도 이상하게 볼 것 하나 없다네’라는 그의 조롱은 어째 우리 사회, 특히 교육 현실을 빗댄 말 같아 물리치기 어렵다.

바보배에 실려가지 않을 사람 없다네

초등학교부터 십수 년간을 오로지 대학입시에만 목을 매는 아이들은 바보가 되기 위한 착실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아이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적이 없다. 당연히 갖게 되는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조차 성적을 위해 억눌린다. 아이들은 이 사회가 만든 제도의 틀 속에서 부모가 원하는 바대로 꾸역꾸역 바보가 되어간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부모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대학에서 밀린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대학이란 간판의 유무 그리고 대학의 서열화에 의한 등급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대학에 가는 게 우선이다.

온 사회가 한낱 아이들의 대학입시에 매몰되는 까닭은 ‘좋은’ 대학이 삶의 기회를 더 많이 보장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수준 높은 대학에서 더 많은 학력과 능력을 쌓기 위해서? 겉으로는 그렇다. 치열한 경쟁을 통과하면 더 많은 기회가 열리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회의 안쪽에는 수준 높은 학력과 능력이 아니라 인맥과 학연이 더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모를지 몰라도 어른들은 안다.

동창과 동문의 인연이 이 나라처럼 질긴 끈을 만드는 사회가 있을까? ‘인맥 만들기’는 사회에서 가장 우월한 처세의 방편이다. 그걸 부모들은 뼈저리게 체험해왔다. 이 땅의 삶이 녹녹지 않다는 것을 진즉에 체득한 부모들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런 끈들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발휘했는지를 모르지 않는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인맥은 삶을 버텨주는 안전그물과도 같다. 대학의 입학과 졸업은 인맥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능력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인연의 끈이다.

원천적으로 빌붙을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선후배 동기들 간에 끌어주고 밀어주고 봐주는, 썩 괜찮아 보이는 ‘미풍양속’은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거의 모든 사회적 사건에서 보이듯이, 아무데나 얽혀든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좋은 학연은 훌륭한 인맥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사회의 부정과 부패의 연루 가능성을 훨씬 높여준다. 이른바 우리 사회의 지도층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다. 더 좋은 학교를 나오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더 막강하고 질긴 학맥을 지닌 사람들이며 동시에 그로 인한 원천적 부패의 가능성이 더 큰 집단을 말한다. 그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하기 쉽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인자들은 알고 있다. 학연과 지연의 고리들은 언제라도 아무데나 걸고 살아남을 수 있는 무쇠 사슬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해보자. 대학입시 경쟁에 붙는 여러 가지 거추장스러운 위선적 진정성을 제거하고 나면 그것은 개인적으로 더 큰 기회이자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무한 경쟁 체제의 출발점이다. 그토록 대학입시에 목을 매는,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이 사회에서 더 강력한 세력에 빌붙을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보장해주기 위한 부모들의 심리가 입시 경쟁의 과열을 낳는다.

교육 정책과 입시 방법을 아무리 달리 해도 별 소용이 없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경제력과 인맥의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논리가 절대적 관습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육이란 무한 경쟁의 수단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보라도 좋다. 살아남기만 해다오. 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교육 논리는 부모로부터 그대로 아이들에게 철저히 제도적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오늘날 교육의 실제 내용이다.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진짜 바보가 되어간다. ‘세상에 바보들이 흔해빠져도 이상하게 볼 것 하나 없다네’라고 한 중세 시인의 빈정거림이 오늘 여기에서도 똑같이 들려온다.

*이번호로 ‘김진송의 종이비행기47’은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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