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택시기사의 의자 만들기

등록 2007-01-05 00:00 수정 2020-05-03 04:24

빤한 월급의 사내에게 차마 만들어 팔 수 없었던 ‘낮잠을 위한 의자’… 같이 만들어보자 했으나 노예노동을 견디는 그에겐 낯간지런 배려였네

▣ 김진송 목수·문화평론가▣사진·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사내들은 태생적으로 목수다, 라는 말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남자들이 뚝딱거리며 뭘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다. 나 역시 그런 과정에서 절로 목수가 되었으니 남 얘기가 아니다.

나무 작업을 하면서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목공작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중에는 취미로 자기가 쓸 책장이며 의자를 만드는 경우도 있고 장차 업으로 삼을 요량으로 목공교실 같은 데를 기웃거리며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취미로 하거나 처음 시작할 때의 즐거움은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기 시작하면 고달픈 노동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연장을 다루며 이것저것 만드는 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 택시 운전사가 그랬다.

“그 의자에서 미래의 꿈을 꾸고 싶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5, 6년 전, 나무 일을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그는 점잖은 중년 사내의 풍모를 지녔지만 어두운 얼굴에 병색이 있는 듯했다. 비닐하우스로 지은 작업실에 찾아온 그는 목공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무 작업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빚더미에 올라 회사의 문을 닫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중이었다. 그의 초췌한 얼굴이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다. 그는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얼굴색이 훨씬 좋아져 있었고 많이 안정되어 보였다. 벌이는 수월치 않으나 주위의 도움으로 빚을 상당 부분 탕감할 수 있었고 남은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새로 지은 나의 작업실을 몹시 부러워했다. 비닐하우스에서 벽돌집을 지어 이사한 작업실이 그럴듯해 보였을 것이다. 돈이 없어 손수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나의 변명(?)에도 그는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시골에 작은 집을 지어 나무 작업으로 소일할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그는 몇 번이나 반복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갈 길이 너무 멀다는 말에 한숨을 섞었다. 그는 내가 만든 의자 중에서 이미 팔려나간 한 의자를 지목했다. ‘낮잠을 위한 의자.’ 느티나무로 나지막하게 만들어 잠깐 눈을 붙일 수 있는 의자이다. 그가 내 의자를 사고 싶다고, 다시 만들어줄 수 있냐고 말했을 때 나는 적이 당황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도록 나는 그 의자를 만들지 못했다. 비슷한 형태의 느티나무를 구할 수 없었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도무지 그 의자를 그에게 만들어 팔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나 역시 일당에 만든 날수를 곱해 대략의 값을 정하지만 의자의 값은 그의 일당이 감당하기에 턱없이 높았다. 나는 농담 삼아 내 물건을 나조차 살 수 없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만든 물건이지만 그 품값을 고스라니 물건 값으로 지불할 여유는 나에게도 없었다. 하물며 빤한 택시기사의 월급 한 달치 이상을 고스란히 바쳐야 하는, 게다가 월급에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빚까지 탕감해야 하는 처지를 알면서 선뜻 물건을 만들어 팔겠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저 만들어주겠노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원하는 바도 아니었으며 나 또한 나의 일당을 축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날 그에게 편지가 왔다. 의자는 잘 만들어지고 있느냐고, 지금은 비록 힘들게 보내지만(그는 앞으로 ‘몇 년을 더 참혹한 노예노동을 견뎌야 깊은 산골 어딘가에라도 정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썼다) 그 의자에 앉아 미래의 꿈을 꾸고 싶다고. 정말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얼마 전 내가 전시를 해 물건을 팔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에게 도저히 의자를 팔 수 없노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나와 함께 의자를 만들어보는 게 어떠냐고, 나무와 연장은 제공할 테니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면서 함께 만들어 가져가는 게 어떠냐고, 쉬는 날 만나서 함께 만들면 그게 훨씬 더 즐거운 일이 아니겠냐고. 그는 흔쾌히 그러마 했다. 그 뒤 한동안 나는 팔린 물건을 배달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택시를 쉬는 날 오기로 한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 달에 하루도 뺄 수 없는 참혹한 노동

며칠 전 그로부터 다시 편지가 왔다. 편지를 읽으면서 그에게는 의자를 하나 만들 여유조차 제대로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야 했다. 그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말씀대로 11월 중순 이후에 찾아뵈려 했는데요. 제 택시 일정이 여의치 않아 그러지 못했습니다. 택시는 26일 만근을 해야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게 되는데요. 날짜상으로는 한 달에 4일, 일요일마다 쉬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한 달에 두 번이 됩니다(오전반에서 오후반으로 바뀌는 일요일). 그것도 중간에 몸이 불편해 하루이틀 빠지게 되면 쉬는 일요일에 벌충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12월 휴일은 10일과 24일 이틀인데, 10일은 이미 날짜가 모자라 대체근무를 했고요, 24일은 아무래도 송년모임 약속과 겹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2007년 새해에 찾아뵙는 걸로 했으면 합니다. 1월 휴일은 7일과 21일입니다. 시간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전에 택시 운전이 ‘참혹한 노예노동’이라고 말한 걸 흘려들은 게 잘못이었다. 그에게 의자를 만들자고 한 나의 제안은 낯간지러운 배려에 불과한 것이었다. 의자를 하나 제대로 만드는 데는, 나무를 건사하고 마름질하는 것을 빼고도, 깎고 다듬고 마감 칠까지 하려면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 그와 함께 의자를 만들기 시작하면 몇 달이 지나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을 내기도 어렵지만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지치고 힘든 몸으로 작업을 한다는 것이 즐거울 수 있을까? 최저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기본급에 사납금까지 쫓기는 택시 운전사의 의자 만들기는 어쩌면 꿈으로 그칠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화가 나기 시작했는데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