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한경쟁 사회에서 약자로 산 경험이 나를 성숙하게 했네…정글의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내 마음 창고를 수시로 살피길
▣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세상은 어떤 법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가? 학교, 직장, 신문 방송에서 은연중에 세상은 오로지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무한경쟁이라고. 모든 사람은 경쟁 상대고 그 경쟁에서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잡아먹힌다고.
이기거나 지거나, 먹거나 먹히거나. 이 절체절명의 양자택일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무리 중 제일 어린 자나 약한 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 언제 커서 내 경쟁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글 속 강자는 약자를 무자비하게 누른다. 눌렸던 약자들이 온갖 굴욕을 참고 자라서 드디어 강자가 되면, 그때의 약자에게 잔인하게 군다. 이게 정글의 법칙을 돌리는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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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줌마 지금은 후회할 거다, 바르르
하나 새도 양쪽 날개가 있고 자전거에도 앞뒤 바퀴가 있듯이, 가만히 보면 정글의 법칙과 대척되는 점에는 사랑과 은혜의 법칙이 함께 돌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모두를 이겨 눌러야 할 경쟁 대상이 아니라, 서로 돌봐주고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법칙 말이다. 강자가 약자를 돌보고 그 약자가 강자가 되면 그때의 약자를 돌보아주는 세상, 내가 구호활동을 하면서 더욱 선명하게 알게 된 세상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 위를 보면 한없는 약자이고 아래를 보면 우리도 힘 있는 강자가 된다. 그러니 누구라도 강자의 달콤한 경험과 약자의 뼈아픈 경험이 있을 거다.
나도 그렇다.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좋았는데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말았다. 재수할 상황이 아니어서 돈벌이를 시작했다. 클래식 다방 디제이, 초등학생 가정교사, 로맨스 소설 초벌 번역 등등. 하루에도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정글의 법칙은 냉혹한 것. 모든 것에 ‘고졸 디스카운트’가 있었다. 대학생에 비해 과외비도 번역비도 반값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도 몰랐다. 내 손으로 돈 번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을 뿐 부당한 반값 대우에 대해 어떻게 해볼 생각도 못했다.
그 바쁜 와중에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 친구는 학교 대신 내가 일하는 클래식 다방으로 출근하며 디제이 박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계속 신청음악 쪽지를 보내는 통에 스토커로 오해받기도 했다. 정신없는 그러나 마음결 고운 법대생이었다.
어느 날 이 친구 집에 놀러갔다. 반갑게 맞아준 친구 엄마가 얘기 끝에 어느 대학에 다니냐고 물었다. 아직 대학에 안 다닌다는 내 대답에 그 엄마의 안색이 한순간 싹 변했다. 그러고는 거의 신음처럼 터져나온 한마디.
“아니! 고졸이란 말이야….”
차마 하지 못한 그 다음 말은 얼굴에 고스란히 쓰여 있었다.
‘고졸인 주제에 감히 일류대학 법대 다니는 내 아들을 넘보다니.’
그 순간, 내 얼굴도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정말 분했다. 이 엄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쁜 일과 슬픈 일에 얼마나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모르지 않는가? 겨우 19살인 내가 나중에 뭐가 될지, 나의 꿈이나 가능성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르지 않는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바르르 떨린다. (방금 전에도 그랬다.) 그 아줌마,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 거다. 나는 그 뒤 대학은 물론 대학원까지 다녔다. 월드비전이라는 번듯한 직장도 있고 무엇보다도 베스트셀러 작가 아닌가. ㅋㅋㅋ
그렇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사회적인 약자가 아니다. 그러니 누가 내 자존심을 좀 건드렸다고 분기탱천하거나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건 너무 초라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기회의 불공평 때문에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변하며 맞서 싸우고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그 친구 엄마처럼 겉모습과 현 상황만 보고 예단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약자의 경험이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다.
굶는 사람 곁의 밀가루 그득한 창고
약자, 약자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들은 바로 난민촌 사람들이다. 그리고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남아프리카 기근 현장, 몇 년간 반복되는 가뭄과 홍수로 한 마을 사람들이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두 살 남짓 된 아이를 안아보았다. 팔다리는 바싹 마르고 배는 볼록하고 빡빡머리에는 정맥이 울퉁불퉁 솟아 있는 꼬마가 내 품에서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중병에 걸린 게 아니라 먹을 것만 있으면 사는 이런 아이들이 주민 500여 명의 작은 마을에 100명도 넘었다.
놀랍게도 거기에서 45분만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 시장에 가니 창고 가득 밀가루가 쌓여 있었다. 창고 주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냐고. 그 아저씨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가씨, 난 장사꾼이에요. 쌀 때 사서 비쌀 때 팔아 이문을 남기는 게 내 일이죠.”
정글의 법칙으로 보면, 이 아저씨는 잘하고 있는 거다. 남이야 죽든 말든 이윤을 극대화해 그 돈으로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일까. 그러나 우리는 정글에 사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아저씨에게 창고를 몽땅 털어 다 내놓아야 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아저씨가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밀가루의 양만큼 아이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지금 내게 다 필요치도 않은 식량을, 그중 일부만 기꺼이 나눠도 사람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식량을 그저 산처럼 쌓아놓는 일이 과연 아프리카 밀가루 창고에서만 일어나고 있을까? 내 마음의 창고도 수시로 눈을 밝히고 점검해볼 일이다. 사랑과 은혜의 법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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