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기득권을 질타하며 소비 행태를 따라 배우는 동료들…진보세력이 매사에 꼿꼿하게 살 순 없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형, 형은 돈 벌어서 어따 써요?”
“어? 그야 융자금도 갚고 아파트 관리비에 각종 공과금, 애 학교 보내고….”
“저는 이번에 반대 찍었어요. 저도 제 임금이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자녀 교육비다 해서 돈이 필요한 고참들이나, 월급 얼마 안 되는 신참들은 한 푼이 더 아쉽겠죠. 하지만 제 주변에 월급 받아서 돈 쓰고 다니는 모양을 보면 임금 1% 더 올리겠다고 고생해 파업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요.”
우리는 혹시 소비의 속임수에 빠졌나
지난달 임금협상과 관련한 쟁위행위 찬반투표로 어수선한 즈음에 경력 11년차인 입사 동기를 우연히 만났다. 이 친구는 노래방에서 도우미 끼고 하룻밤에 몇십만원을 쓰면서 돈타령하는 주위 동료들 꼴이 보기 싫단다. 이런 발칙한 소리라니. 누가 들으면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니가 왜 까탈이냐’는 핀잔을 듣기 딱 좋은 얘기다.
아닌 게 아니라 5년 반 해고 생활을 하다 지난해에 복직을 하고 보니 현장이 많이 변했다. 예전의 끈끈한 동료애 같은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무엇보다 먹고 마시고 노는 소비문화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물론 현장이 이런 문화의 일색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상화된 흐름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번 임금협상만 해도 임금 외에 해고자 복직 등 몇 가지 다른 안건이 있었지만, 현장의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임금 외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내가 해고자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다 해고된 옛 동료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이 정도인가 싶어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아무튼 나는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냐는 동기 녀석의 ‘엉뚱한’ 물음에 별게 다 궁금해졌다. 사는 게 뭐 다 똑같겠지 하면서도 ‘프라이버시’라는 불가침의 사적 영역이 주는 호기심이랄까, 남과 자기를 비교해보고 싶은 심리의 발동이랄까…. 월급을 80만원 받는 사람이나 500만원 받는 사람이나 모두 돈, 돈 하니,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고 있을까 궁금하다.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의 라는 책이 생각난다. 호지 여사는 국민총생산(GNP)이 사회 발전의 지표로 쓰이는 것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그녀는 환경과 인간의 공동체적 가치를 파괴하면서 만들어지는 불필요한 산업과 소비, 예컨대 개발을 이유로 물이 너무 오염돼서 생수를 사먹으면 이것이 GNP로 합산되고 경제성장으로 측정되는 터무니없는 현실을 ‘개발의 속임수’라고 했다. 당시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을 얻었다. 물론 70, 80년대 라다크라는 티베트 지역을 배경으로 쓰인 글이지만 그의 이런 문제의식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서 쓰는 일에도 ‘소비의 속임수’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혹 우리에게도 불필요한 소비, 인간의 공동체적 가치를 파괴하는 소비를 하면서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착각하는 속임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철도 현장이 임금 문제로 시끄러웠던 지난달, 대한민국은 주택 문제로 온통 난리가 났다. 가 앞서가면서 일부 언론이 공직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는 폭로성 기사를 내보냈다. 주택 관련 고위 공직자와 국회의원들의 부동산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몇 배로 뛰었다든지, 교육부총리들이 자신들의 자녀는 특목고에 입학시키면서 공교육의 정상화를 말하는 위선을 보이고 있다든지 하는 내용이었다. 권력집단에 경종을 울려서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언제는 그들이 안 그랬나? 나는 이 나라의 기득권 집단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는 것은 개에게 ‘특정 배설물’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는 쪽이다. 국민들도 언론보도를 접하고 ‘이런 죽일 놈들’ 하면서 분노했을 터이다. 그러나 어쩌랴. 각종 통계와 사실만 보면 당장 봉기라도 일어나야 할 불평등한 세상이지만 바닥의 민심은 거꾸로 그런 ‘죽일 놈들 따라 배우기’ 쪽으로 쏠려가고 있다.
“우리는 당신들과 다르다” 말하라
이쯤 되면 이 사회에 총체적 도덕 강의라도 필요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주변을 돌아보라. 덜하고 더하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온통 ‘돈벼락’을 기대하는 세상에서 누가 누구를 가르칠 것인가? 누군가 말한다. “그래도 민주노총이, 진보세력이 있잖아요.” 맞다. 이들이 버팀목이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진보세력이 ‘무상의료’ ‘무상교육’ ‘사회공공성 강화’ 하면서 공중전을 벌이는 사이 바닥의 민심은 ‘아파트 부녀회의 가격담합 공고문’에 마음을 빼앗기고, 노래방에서 시름을 불사르는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다는 비정규직과 사회빈곤층의 흔적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어느 혁명가는 ‘아무리 분노한 대중이 많더라도 조직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단지 불평불만 세력일 뿐이다’고 했다. 민심의 답답한 마음을 뻥 뚫어줄 ‘어른’과, 민심의 심금을 울려줄 ‘신뢰할 만한 세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진보에 무슨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시절도 아닌 터에 매사에 꼿꼿하게 살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어떨까. 가 기득권의 위선을 폭로할 때, 민주노총과 진보세력의 지도부가 스스로 우리의 주택은, 교육은 이렇다고 맞장구를 쳐준다면. 어차피 국세청이나 정보기관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바닥의 민심에게 밝히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당신들과 다르다, 우리가 지향하는 길은 이것이다라고 새로운 물꼬를 터보는 것은 어떨까.
또 역시 흥분하고 말았다. “당신은 어때”라고 누가 묻는다면 “아니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주제에 건방을 떨고 말았다. 그래도 한 번 해보고 싶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세상의 흐름에 어쩌지 못하고 끌려가는 나의 벗들과 민심을 마음에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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