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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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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번데기

등록 2007-02-15 00:00 수정 2020-05-03 04:24

꼬물거리며 생각을 토해내던 생각벌레가 멈추면 흉측하게 되네…굳어져 손쓸 수 없는 조국과 민족·인류의 출몰에 주의하시길

▣ 김진송 목수·문화평론가

혹시 ‘생각벌레’를 아시는지?

누구나 수많은 생각벌레를 키우고 있다. 벌레들은 꼬물거리며 많은 생각들을 토해내고 우리를 즐겁게 하기도 하고 괴롭게 하기도 하며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걸 만들어내기도 한다. 생각벌레들이 살아서 움직일 때는 걱정이 없다. 그러나 어떤 생각벌레든 움직임을 멈추면 번데기로 변해버리고 만다. 대개 생각에 병이 들면 벌레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러다가 점점 굳어져 번데기 상태가 되는데 이때부터 우리에게 심각한 질환을 일으키게 된다. 단단해진 생각번데기가 변태를 하여 깨어날 때는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대개는 흉측한 벌레가 되지만 이미 그때는 제멋대로 날아다니게 되어 더 이상 손쓸 수 없게 된다.

아파트 의미가 무너져 억억 소리를 내다

누구는 생각벌레가 고치화한 생각번데기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말도 실은 생각을 뜻하는 이데아와 번데기를 뜻하는 명사형 어미가 합쳐진 것이니 생각번데기와 같은 말이다. 모두 사람들이 한 가지를 집요하게 생각하다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이 단단하게 굳어진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어떤 말이나 생각이든 번데기가 되기 쉽다. 자칫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의 생각을 따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생각벌레는 번데기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사람 사는 곳에는 그런 생각번데기들이 수없이 많다. 생각번데기로 변한 생각벌레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 한둘이 아니다. ‘아파트’에 이상한 벌레가 꼬여들어 번데기로 변하게 되면 아파트란 건물의 의미도 소리 없이 무너지고 마는데, 여러 사람이 거주하는 집단 주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자 ‘억억’ 소리가 들리는 광풍의 진원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명절이 다가온다. 설날이다. 이즈음이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이라는 생각번데기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는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처럼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발작을 일으키는 아주 희귀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이 증세는 해가 가장 붉게 떠오르는 정초와 달이 가장 크고 밝은 8월이면 어김없이 나타나곤 한다. 평소에는 시골을 개뿔만도 못한 곳으로 여기며 고향의 땅값을 죄 합쳐도 아파트 반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데 혀를 차다가도 그즈음이 되면 두엄 냄새를 사랑하게 되고, 있지도 않은 시골 인심을 치켜세우기도 하고, 인륜의 최고 도덕이라 치부하는 효가 시골 마을 뒷산 자락에 묻어 있기라도 하는 양 북새통을 떤다. 세상의 탈것들은 다 동원되어 떼로 몰려가는데 그때는 부모, 가족, 효도, 전통, 민족, 정, 우애와 같은 생각번데기를 옆 좌석이며 뒤 트렁크에 잔뜩 실어가기도 한다. 어쨌든 그만큼 고향이라는 생각번데기의 위력이 막강하다는 말인데, 문제는 증세가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 싶게 고향에 대한 냉대와 홀대를 넘어 아예 존재조차 인정하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러 생각번데기를 유포하는 곳은 언론이다. 언론이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분포된 생각을 좇아가는 걸 지상 과제로 삼고 있는 집단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각벌레들을 고치화해 생각번데기로 전화하는 호르몬을 생산하는 걸 주 임무로 삼고 있다. 그들은 늘 탈각이니 탈피니 탈태니 하는 말을 하기 좋아하지만 그 말들은 스스로 생각번데기를 유포하는 진원지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니 특히 언론, 그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접하게 되는 언론일수록 그들이 만들어낸 번데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올해는 특히 생각번데기들이 빈번하게 출몰할 것으로 예측된다. 대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가 시작되면서 이제부터 지겹게 듣게 될 조국과 민족, 인류, 미래, 자유, 민주, 개발, 경제 등등의 생각번데기들이 정치꾼들의 입에서 튀어나와 이리저리 마구 세상을 오염시키며 굴러다닐 것이 틀림없다. 생각번데기가 가장 많이 출몰하는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생각벌레를 자기들의 번데기들로 변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름알데히드 소독법, 쓰레기 소각법

정치인들은 되도록 많은 생각번데기들을 모아 더 크고 단단한 고치를 만들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이다. 아마 누구는 이제는 빛바랜 생각번데기를 꺼내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 옛날의 향수를 끌어모아 이제는 박제화된 고치에 들이부으며 부활하도록 애쓸지도 모른다. 그 고치에서 나온 흉측한 벌레가 세상을 얼마나 괴롭혔는지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누구는 있지도 않은 미래의 생각번데기를 눈앞에 그려 보이기도 할 것이다. 개발이란 벌레가 파먹은 땅을 또 한 번 뒤집어엎기 위해 더 큰 벌레를 등장시킬 것이다. 그들은 대개 ‘대권’(大權)이란 번데기에 집착한 나머지 그 말이 원래 ‘대권’(代權)이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니 각별히 조심할 일이다.

예방책이 없지는 않다. 일단 정치인들이 상투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 생각번데기들을 소독하는 일이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들이 가장 즐겨 쓰는 민족과 국민이란 생각번데기는 매우 강력한 소독약이 필요하다.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최소한 일주일은 담가두었다가 변색이 되지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설사 그대로 있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그대로 쓰레기장에서 소각하는 것이다. 개발, 경제, 발전이라는 생각번데기 역시 매우 강력한 소독약이 필요하다. 이 번데기들에 황산화나트륨을 적당히 도포하면 돌기가 튀어나오는데 돌기가 어느 쪽을 향하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만일 그게 또 다른 기득권자들의 생각번데기를 향하고 있다면 이 역시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낫다.

아무쪼록 조심하시길! 그래도 가장 좋은 예방책은 스스로 생각벌레를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벌레가 굳어져 번데기가 된 다음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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