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품질’이 중요한 시대, 마음을 벼려야 하는 시대…김형 이형, 한발짝 물러나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 황하일 철도노동자
김형.
철도위원장 선거에 산별노조 건설에 한창 바쁘시겠습니다. 이번에도 제일 먼저 선거대책본부를 만들고, 어김없이 ‘단결과 투쟁’을 구호로 정하셨군요.
김형, ‘단결’이라는 구호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운동이 잘나갈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처럼 노동운동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할 때는 더욱 빛을 내는 단어니까요.
다수파가 단결을 외친다면…
그런데 김형, 이 단어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언뜻 누구나 쓸 수 있는 좋은 말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다수파의 전유물처럼 사용되곤 하거든요. 이를테면 소수파가 단결을 말할 때 다수파가 호응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수파가 단결을 들고 나오면 이에 호응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분열주의자나 왕따가 되기 십상입니다. 하여 다수파가 이 용어를 쓸 때는 조건이 따릅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은 상태라야 합니다. 그래야 이 단어가 제 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김형 쪽에서는 지난 6년 동안 이 단어를 선점해 줄곧 철도노조의 ‘집권여당’을 해왔습니다. 이번에는 양보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진정한 ‘단결’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어려우니 단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시는 바가 ‘우리 쪽으로 단결’을 고집하는 것이라면 이는 대중을 현혹하는 기만적인 언사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우리한테 그러느냐”고요? 그 이유는 김형 쪽에서 단결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시는데다, 단결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다수파이기 때문입니다. 조합원들의 눈에 정책이나 노선의 차이는 보이지 않고, 단지 조직의 차이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노동운동이 살려면 현장의 조합원들이 살아나야 합니다. 조합원들이 생동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중에서도 제일은 현장의 노동자들과 소통해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튼튼히 하는 일입니다. 이는 권력을 잡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발상과는 다른 차원의 문젭니다. 지금 현장 조합원의 다수는 도대체 산별노조가 뭔지, 어떻게 된다는 건지도 잘 모릅니다. 상층에서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산별노조 건설 일정에 대해 “위에서 노는 사람들 일자리 창출 아니야” 하는 냉소가 평범한 조합원의 입에서 나오는 실정입니다.
내친김에 까칠한 얘기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언젠가 민주노동당 대표 선출을 앞둔 시기쯤이었던 같습니다. 김형과 함께하는 젊은 친구들이 주소지를 옮긴다든지, 공장위원회로 적을 옮긴다든지 하면서 지구당대회를 다니며 위력시위를 하여 물의를 빚었지요. 저는 이것이 과연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풀뿌리 정치의 구현인지 납득이 안 됐습니다. 통일운동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되는 건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운동을 왜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까. 정말이지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형.
몇 년 전에 안면이 있는 분에게서 재테크 강의를 들을 적이 있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집을 되팔아 이문을 남겼는데, 너무 빨리 처분하는 바람에 더 큰 이문을 얻지 못했다는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씁쓸했습니다. 상급단체의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인지라 집회에 나가서는 사회도 보고 주로 하시는 말씀이 이 사회의 공공성에 관한 것이었기에 더 그랬습니다.
엊그제께는 6개월 전에 결혼한 현장의 후배가 대뜸 아직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자기 아내가 먼저 제안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한 채씩 아파트를 분양받을 때까지 혼인신고를 미루자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형, 우리가 4천만원 모으려면 몇 년이 걸리는지 아세요” 하고 정색을 하는 겁니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형, 언젠가 그랬죠. 아이들에게 일고여덟 가지 사교육을 시키자니 죽겠노라고. 이른바 ‘좌파’를 자임하는 이형에게서 그 말을 듣는 것은 의외였습니다. “왜 그래요?” 하고 묻는 저에게 이형은 “나는 아닌데, 집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책임은 벗고 싶다니요. 저는 ‘좌파’의 매력이 원칙에 충실하고 매사에 ‘순도가 높다’는 것으로 느껴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형의 얘기에서 혼돈을 느낍니다.
순수와 열정이 여전한 이형. 운동권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운동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정당성이 주어지고, 존경받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적’들이 아니라 운동 내부에서 “저 사람 때문에 운동 못하겠다” “차라리 저 사람은 운동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난무하는 험악한 시절이 되었습니다. 운동에도 ‘품질’이 문제가 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좀더 벼르고 다듬어서 어찌됐든 살맛나는 세상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동이 어떤 강박관념이나 집착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감당하기 어렵다 싶을 때는 반발 물러서 우선 준비된 정도만큼의 진정성으로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가뜩이나 열세인 선거판을 극복해보려 분투하시는 이형에게 엉뚱한 얘기로 생각을 어지럽혔다면 미안합니다.
언젠가는 한 꺼풀 성숙한 모습으로
박형.
떠나지 마세요. 박형이 운동을 떠날 때가 아닙니다. 모가 나지 않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원칙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박형의 모습이 저는 좋습니다. 조직 밖으로 나와서 홀로 선다는 것이 막막하고, 익숙하지 않을 테지요. 정말 괜찮다고 생각되는 친구들이 갈수록 후면으로 물밑으로 숨어드는 모양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한 꺼풀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전면으로 물위로 나올 거라 믿습니다.
힘들거든 쉬면서 건강도 챙기고 사색도 하고 그러지요 뭐.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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