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지난주 강원도로 손수 황톳집을 짓고 사는 어느 철학자를 찾아갔다. 그 집이 있는 산 중턱으로 오르는 철학자의 길은 하이델베르크나 교토에 있는 같은 이름의 길보다 더 감동적이었으나 힘없는 나는 숨이 찼다. 독일에서 받은 박사학위나 교수직을 당당하게 거부하고 지난 10여 년 오로지 몸과 영혼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생명철학자로 외롭고도 어렵게 살아온 그가 존경스러운 만큼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노동법 책을 안고 분신한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법을 공부한다고 한 뒤 나는 그에게 부끄럼 없는 학자로 살아왔던가? 만약 비정규직 강사로 지금까지 살았다면 노동법 공부를 계속 하기라도 했을까? 그런데도 전태일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도 비열한 먹고살기의 핑계이자 그 죽음을 욕보이는 짓이 아니겠는가?
이상한 나라의 법대
그러나 아직도 대학에는 정규직 수입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박봉으로 힘겹게 살아가면서 열심히 연구하고 강의하는 비정규직이 너무나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불거지기 훨씬 전부터 대학의 그들은 엄청난 차별을 받았고, 지금도 일반 정규직의 2분의 1이라는 비정규직 수입보다 몇 배나 악화된 조건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그 수는 정규직의 몇 배여서, 전체 노동자의 반이니 아니니 하는 비정규직 전체 비율보다 더욱 높아 가장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다. 대학 비정규직은 모든 학과에 있으나 특히 인문학 쪽에 많고, 그들의 문제점은 ‘인문학의 위기’와 직결된다. 이는 많은 학생들이 더 이상 인문학을 지망하지 않고 법학 등 인기 학과에만 몰려 마침내 인문계열 학과가 폐쇄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어서 법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미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인문학은 내가 전공하는 법학처럼 ‘고시망국병’을 초래하기는커녕 그 자체가 얼마나 순수하고 고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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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정말 위기가 있다면 바로 ‘법학의 위기’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우리 법학 교육에 문제가 많아 미국식 로스쿨을 새로 만들어야 제대로 된다고 하는 만큼 이미 법학은 파탄을 맞았는데도 올해 입시에서도 여전히 최고 인기라니 정말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학생들, 이상한 학부모들, 이상한 고교 교사들이다. 이런 파탄이 오기 전에 법학자들이 스스로 그 ‘위기’를 말하고 대처했어야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이라도 있었다고 할 수 있거늘, 도리어 전혀 그렇지 못해 결국 타율적으로 권력에 의해, 미국식이 만능 해결사인 양 그 도입이 강요되고 있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다른 전공 분야보다 무슨 대단한 공로나 특권이라도 부여받은 양, 학부가 아닌 대학원인 로스쿨 교수로 출세하고, 엄청나게 비쌀 등록금에 월급도 당연히 오르리라고 좋아하는 교수도 많은 듯해 더욱 창피하다.
대학의 비정규직부터 해결하라
이에 비해 인문학자들은 자율적으로 ‘위기’를 진단하고 나서서 역시 존경스럽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큰돈을 퍼부어주어야 한다고 권력에 요구하는 것에는 의문이 있다. 로스쿨 같은 미국 방식을 주장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지만, 그 위기를 초래한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상한 곳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못해도, 도리어 권력과 자본에 기생해 물질주의로 치닫는 사회 전반의 위기 속에서 나타난 인문학의 위기를 다시 그 물질주의로 치료하려 하다니 역시 인문학의 위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실 정부나 기업이 나서서 인문학을 적극 지원해 위기가 처음부터 없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 정도의 정부나 기업이었다면 사정이 이 지경까지 악화됐겠는가?
그래서 저 강원도의 황톳집 철학자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의 생명철학이 우리 모두에게 깊이 뿌리내리길 진심으로 빈다. 그런 새로운 인문학자들이 건재하여 사회의 위기에 적극 대처하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없으리라고 믿고 싶지만, 역시 그들이 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지 못해 안타깝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우리 대학의 비정규직 차별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다른 해결책은 둘째 치고, 정규직 스스로 월급을 동결해서라도, 또는 삭감해서라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해결 없이는 인문학의 위기가 아닌 ‘학문의 위기’ ‘대학의 위기’는 더욱더 악화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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