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이철’ 사장님의 행보를 보며 느낀 허탈한 심정… 변절이 떳떳해진 세상, 긴호흡으로 나를 돌아보고 싶다
▣ 황하일 철도노동자
내가 다니는 직장의 사장은 ‘사형수 이철’이다.
처음 이분이 사장으로 취임할 때 현장 직원들의 기대가 컸다. 지난 낡은 관료 출신 얼굴들과는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였다. “이철이 누구야” 하는 서른 살 앞뒤의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후배들도 있었지만, 직원들끼리 입소문을 타면서 이런 기대는 한껏 부풀려졌다. ‘낙하산 인사’니 ‘보은 인사’니 하는 당시의 정치권 공방은 적어도 철도 노동자들에게는 관심사항 밖이었다.
나는 이분이 민주화운동 하려고 사장을 맡은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 답답한 직장에 상식과 합리가 조금은 자리잡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월급 1원만 받고 청국장 먹는 사장?
사장의 취임 일성은 멋졌다.
“나는 쉽게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언뜻 식상하게 들릴 법한 이 말 한마디에 많은 직원들이 시쳇말로 ‘뻑’갔다. 노동자들의 경험으로 볼 때 한국의 노사 현실에서 어떤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기왕에 한 노사 간 약속조차 손바닥 뒤집기처럼 깨는 게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지겹게 겪어온 탓이다.
하지만 철도 노동자들의 이런 기대가 ‘그 나물에 그 밥’ ‘혹시나가 역시나’ 하는 배신감과 냉소로 바뀌는 데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사장은 노사 현안 전반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찍혔다. 퇴진 투쟁의 표적으로까지 되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철 사장에게도 어떤 피치 못할 인간적 고뇌가 있지 않았을까. 사장과 노동자라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의 차이라든지, 최선을 다해봤지만 능력 밖이었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아닌 것 같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이철 사장은 해고자의 복직에 야박하다. 철도 해고자는 갈팡질팡한 정부 정책의 희생양이다. 그럼에도 다른 공기업의 사례에 비추어 지나치게 인색할 뿐 아니라, 그 형식과 내용 면에서 해고자에게 굴욕을 강요한다. 노동자로 치면 ‘사형수’이고 ‘양심수’라 할 해고자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철’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비정규직 KTX 여승무원들의 눈물 젖은 얼굴을 대하면서 “청국장이나 먹으러 가자”는 정치적 언사로 상처를 안겨줄 필요가 있을까. 뿐인가.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이철 사장이 “월급을 1원만 받겠다”면서 만만한 노동자를 상대로 속 보이는 ‘압박정치’를 하는 모습은 차라리 볼썽사납다.
내가 이철 사장에게 기대가 있었다면 막연히 노동자의 편을 들어달라는 따위가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사형수 이철’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인간적 품격의 자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월급 1원을 받아, 청국장을 사 먹으면서, 약속을 저버리는 식상한 ‘정치인 이철’을 보면서 나의 작은 미련을 놓아버렸다.
허망하다. 어쨌든 어려운 시기 용기 있게 살았던 가치 있는 삶이 아니었던가. ‘사형수 출신’이 이럴진대, 웬만하면 운동권 언저리에 걸쳤던 시절을 ‘386’이라는 상품으로 포장한 아무개 아무개 인사들에 대한 변절 시비는 오히려 한가로워 보인다.
“절반이 넘어갔다. 이미 김영삼 정권 때 그랬다. 남은 절반 가운데 또 절반이 갔다. 김대중 정권 때다. 노무현 정권으로 다시 절반이 갔다.”
9월30일치 ‘손석춘 칼럼’이 전하는 문정현 신부의 장탄식이다. 문 신부는 이들의 변질이 ‘권력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나야 내공이 신부님에 미치지 못할뿐더러, 그리 도드라지게 살지 못한 탓에 권력의 맛이 어떤지 잘 모른다.
다만 좀 특이한 게 있다. 과거에도 변절 시비는 있어왔다. 하지만 지금과는 좀 다른 양상이다. 예전에는 변절의 시비 대상이 이처럼 많지 않았다. 또 이른바 민주세력이라는 쪽에서 변절이라고 하면 그냥 변절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변절의 시비 대상이 세력화되었다고 할 만큼 너무 많고, 비판을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가르치려 든다.
한국 진보의 뿌리가 이 정도였는가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했다. 참 많이 변했다. 민주 혹은 진보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진 느낌이다. 게다가 요즘 세상살이의 면면들을 들여다보면 마치 제멋대로 사는 것이 진리인 양 막가자는 세상처럼 보인다. 막가자는 세상 앞에서 진보는 무기력하다. 속상하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진보의 뿌리가 이 정도 수준이었던가. 이토록 속수무책이고 왜소했던가. 우리 시대의 지성이라 할 신영복 교수가 정년퇴임식에서 “우리 사회에 신뢰할 만한 개인도, 집단도 없다”고 했던 고언이 아프게 와 닿는다.
나는 어떤가.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지난 20여 년, 고작 이런 세상 꼴을 보려고 악다구니를 쓰며 살았던 것인가? 허탈감과 함께 자책이 앞선다. 화살이 되어 날아간 사람들을 붙들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오늘의 현실은 세상을 바꾸고자 애써왔던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고, 실력이고, 자화상이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후지게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일까. 요사이 새삼 내 자신의 수준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서 그동안 변죽만 울리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곱게 늙어야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인생이 좀 어수선하다.
막가자는 세상은 다소 고단하고 지친 나를 가르친다. 현실의 삶 속으로 더 녹아들라고, 긴 호흡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진정한 진보가 무엇인지 성찰하라고 한다.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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