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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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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카 할머니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록 2006-09-30 00:00 수정 2020-05-03 04:24

며칠간 폐휴지 모아봤자 달랑 2500원이라는 전오순씨의 생업에 동참하다… ‘새마을 일’나가야 입에 풀칠… 77살 노구 이끌고 하루도 쉴 수가 없다네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빵빵~) 왜 안 비키고 길 막고 그래요!”

운전사가 고함을 지른다. 리어카 위에 수북이 쌓인 박스와 빈 병들이 위태위태하다. 신경질적인 경음기 소리에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의 마음은 조급해진다. 그러나 주인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의 범위를 넘어서버린 리어카. 운전사의 재촉에도 아랑곳없이 도로를 막고 천천히 굴러가는 게 얄밉기만 하다. 질질 끌리는 발걸음,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이 안쓰러워 할머니 뒤에서 리어카를 밀었다. 그렇게 전오순(77) 할머니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아이구, 젊은 샥시가 고맙게. 그랴도 힘드니께 살살 혀.”

“정부 지원, 자식들 있다고 안 줘”

밀어주는 걸로 성이 안 차 할머니 대신 리어카를 끌었다. 리어카는 생각했던 것보다 무겁고 말을 안 들었다. 특히 언덕을 오를 때는 힘이 많이 부쳤다. 이런 걸 여든이 가까운 앙상한 할머니가 매일 끌고 다니시다니.

안쓰러움과 놀라움, ‘할머니가 힘든 일을 하게 된 사연은 뭘까’ 하는 호기심이 교차하는 가운데 어느덧 리어카는 할머니네 집 앞에 도착했다.

박스를 줍는 리어카 할머니, 지하철에서 버려진 신문을 모으는 할아버지.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 돼버렸다. 그래서일까? 그분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점점 더 무뎌져 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나 마음 착한 친구가 “저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라는 안타까운 자괴감에 빠졌을 때, 또 다른 친구가 “나도 늙어서 저렇게 힘든 일을 하면 어쩌지?”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 그동안 그분들께 무관심했던 내 시선을 거둬야 했다. 그리고 할머니 집 앞에 수북이 쌓인 박스들에 눈길을 돌렸고 절뚝거리는 할머니의 다리에 관심이 갔다. 거실의 허름한 식탁과 그 위에 쌓인 하얀 먼지들, 누렇게 바랜 벽지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거 잡숴봐, 맛있어.”

할머니가 내민 분홍 소쿠리에는 고구마가 들어 있었다. 삶은 지 오래된 듯 고구마는 살짝 말라 있었다. 고구마 껍질을 벗길수록 할머니의 사연도 술술 벗겨졌다.

“할부지는 나보다 나이가 8살 많응께 여든다섯 살. 나이가 많아서 힘들어 일 못해. 자슥들은 저그들 먹고살기도 바께, 내가 벌어야지. 그런데 며칠쓱 모은 박스를 한 리어카 팔아도 2500원밖에 안 줘. 그랴도 놀면 뭐해. 반찬값이라도 벌어야지. 정부 지원? 난 자식들 있다고 그런 거 없어. 새마을 일(노인들을 위한 공공근로사업) 하니까 그래도 30만원씩 받아서 겨우 살지. 그것도 전기세, 가스, 전화세 주고 나면 안 남어. 김치도 어쩔 때는 못 담가먹을 정도로 살기가 힘들어. 다리라도 안 아프면 더 많이 일할 텐데, 다리가 아파서.”

기자는 할머니 생활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새마을 일’이라는 것이 궁금해져 체험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새마을 일? 아서 힘들어. 할미 도와주는 건 좋은디 힘들어. 하지 마.”

할머니는 기자를 말렸지만 얼마나 힘든지, 어떻게 고생하시는지 알고 싶었다. 내 고집을 꺾지 못한 할머니는 다음날 오전 7시30분까지 당신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아이고, 참말로 약속을 지켰네. 난 안 올 줄 알았어.” 할머니의 미소 속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출발지인 마포구청역으로 향했다. 마포구청역으로 가는 내내 할머니는 빈 병, 신문지를 손가방에 주워 담으셨다. 지하철에 버려진 무가지 신문들을 청소하는 것도 할머니 몫이다. 우리에게 쓰레기가 할머니에게는 모두 돈인 것이다. 가방은 어느새 빵빵해져 무거웠다. 홍대입구역에서 내린 뒤 근처 ‘와우산’ 밑으로 걸어갔다.

술기운으로 일하는 노인들

이미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도착해 계셨다. ‘오늘의 미션(임무)’은 와우산 주변 지역의 ‘하수도 오물 청소하기’. 말이 청소지 연로하신 분들이 하기에는 고된 작업이었다. 일이 힘들다 보니 몇몇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하기 전에 약주를 하고 술의 힘을 빌려 일을 하셨다. “쿵쿵~딱, 스르륵.”

먼저 할아버지 한 분이 하수도 뚜껑들을 망치로 쾅쾅 때린 뒤 뚜껑을 열었다. 검은 오물들이 단단하게 굳어 하수도 바닥에 쌓여 있었다. 괭이를 든 할머니가 오물을 파면, 삽을 든 다른 분이 오물들을 지상으로 걷어냈다. 그러면 더 연로하신 분들이 빗자루로 오물을 쓸어담아 리어카에 버렸다. 괭이질, 삽질, 빗질 모두 해봤지만 하나같이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무거운 삽으로 흙을 퍼서 리어카로 옮기는 작업을 계속 하니 손마디도 아프고 팔뚝과 어깨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오물을 빗자루로 쓸 때마다 먼지가 많이 나서 목이 칼칼해지고 코끝이 간지러웠다. 이렇게 젊은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을 다들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하셨다. 특히 성말용(76) 할머니는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이건만, 괭이로 딱딱한 오물과 자갈들을 금광 캐듯 파헤쳐 부쉈다. 그러나 전오순 할머니는 “저거 술기운이여. 술 마시고 저렇게 힘쓰면 몸 망가질 텐데, 만날 저렇게 혀”라며 성말용 할머니 건강을 걱정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왔다. 와우산 밑에서 돗자리를 깔고 각자 싸온 도시락을 펼쳤다. 전오순 할머니는 기자를 위해 고추장통에 밥을 가득 담아오셨다. 밥은 퍼석퍼석해 질이 나빴고, 반찬도 된장과 김치가 전부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다들 맛있게 잡수셨다.

“짠짠 짜라자짠, 울지 말아요. 말없이 그냥 가세요오~.”

식사 뒤 술이 살짝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고조돼 노랫가락이 나왔다. 그러나 이내 노래 대신 하소연들이 터져나왔다.

“새마을 일 15일밖에 못하니까 돈이 30만원뿐이야. 남편도 없이 나 혼자 이걸로 먹고살기 너무 힘들어. 그나마 이 일도 잘릴까봐 다리에 금이 가도 절뚝거리며 일하러 나왔잖아. 3일 이상 쉬면 다른 사람한테 자리가 넘어가니까. 이것도 못해서 난리들이야. 남들 돈 벌 때 뭐하다가 지금 이 지랄 하고 다니나 몰라. 그나마 이 일이라도 많이 시켜줬음 좋겠어.”

김선임(63)씨는 붕대 감은 다리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속내를 털어놨다. 김재수(63)씨도 일할 기회를 얻고 싶어했다. 그는 “자식들이 돈을 안 줘서 돈이 없는데, 일하는 날짜를 늘려주던지 돈을 더 주던지 했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했다. 성말용 할머니는 “난 자식들한테 의지하기 싫어서 여기 나와. 찬값이나 하다못해 담뱃값이라도 버니까 자식들한테 손 안 내밀어도 되잖아”라고 새마을 일을 나오는 이유를 말하셨다. 모두 ‘먹고살기 위해’ 일하려 했고, 또 일거리만 있으면 더 하고 싶다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나 특별한 재주도 없고 쇠약한 그들을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박스 보기를 황금 같이 하라

더 젊을 때는 건물 청소 일이라도 할 수 있어 어느 정도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박스 줍는 일뿐”이라며 전오순 할머니는 서운해하셨다. 그나마 박스 줍기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져 1kg에 60원 받던 걸 이제는 30원으로 가격이 떨어졌다. 아무리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쥐어지는 것은 고작 1천원짜리 두 장뿐. 그래도 당신 눈에 전단지 쪼가리가 발견되면 종종걸음하며 재빠르게 집었다. 할머니는 “1천원은 누가 거저 주냐”며 새마을 일을 마친 뒤에도 박스를 찾아 성산2동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둘쨋날은 첫날과 달리 무거운 리어카가 아닌 작은 수레를 끌고 ‘박스 찾기’에 나섰다.

박스가 보이면 금은보화라도 발견한 양 반가웠다. 때론 박스 안에 코 푼 휴지, 과자 부스러기, 우유갑 등 쓰레기가 뒤섞여 있어 분리 수거를 해야 할 정도로 더러웠다. 박스를 펼쳐 납작하게 만든 뒤 수레 위에 차곡차곡 쌓았더니 꽤 묵직했다. 동네 한 바퀴 돌고 박스와 신문을 정리한 뒤 누워서 쉬고 있는데 “놀이터 앞에 책이 잔뜩 쌓여 있다”는 한 아주머니의 제보로 다시 놀이터로 갔다. 돌아와서 쉬는가 싶었더니 동네 할머니가 당신 집에 박스가 많다며 가져가라고 해 또 일해야 했다. 결국 세 번째 출동을 끝낸 뒤, 할머니와 나는 침대에 쓰러져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날 무리한 탓에 오른 손마디가 기사를 쓰는 지금도 부어 아프다. 이런 힘든 일을 할머니는 매일 하신다.

열심히 사시는 할머니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아픈 다리를 이끌고 박스를 줍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의 지원도, 복지사의 방문도, 이웃의 관심도, 자식들의 보살핌도 할머니에게는 없다. 그래서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할머니를 위해, 그리고 고령화 시대 미래의 노인이 될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중·장기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복지예산 증세 정책에 반대하며 오히려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복지예산 감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늙고 병들어서도 박스 주우며 살아갈 수 있느냐고. 말라 비틀어진 고구마로 끼니를 때울 수 있냐고. 아파도 병원을 가는 대신 일하러 나갈 수 있냐고. 고령의 노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복지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최소한의 인권이다. 기자가 먹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아이스크림을 “아까운 걸 왜 버리냐”며 다시 집어 드시며 맛있어하던 할머니의 표정이 아른거린다.



“3년새 고물수집상 두배 증가”

공급은 늘고 수요는 줄고… “이틀에 쌀 한가마니”는 옛말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폐지·고물 수집상들 간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자원고물상’을 운영하는 장동호(39)씨는 “IMF 이후 고물수집상들이 급증하더니, 최근 3년간 고물수집상 일을 하는 사람들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고 말했다. 고물수집상을 하는 사람들은 별다른 수입이 없는 노인들과 실직자들이 대부분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을 수 없는 나이 든 고물수집상도 많지만, 막노동 일거리조차 찾지 못한 젊은 실직자들도 차를 이용해 폐지와 고물을 수집해 고물상에 팔고 있다. 이렇게 경쟁이 심하다 보니, 고물수집상들은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반면 폐지·고철을 재활용하는 공장에서는 야적해놓은 재고 물량이 많은 반면 물건은 팔리지 않아서 폐지·고철 수요는 많이 줄어들었다. 수요는 없는데 공급만 늘어나다 보니 요즘 폐지·고물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20년 전에 박스 1kg당 가격은 20~30원(중간고물상에서 받는 가격)이었는데, 요즘도 박스 1kg 가격이 30원이다. 20년 동안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가격 하락이다. 반대로 말하면 예전에는 고물수집상의 수입이 좋았다는 얘기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2일 일하면 쌀 한 가마니를 너끈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고물수집상은 돈벌이가 잘됐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쌀 가마니는커녕 담뱃값도 겨우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수입이 좋지 않다.
고물수집상이 가져온 폐지와 고물은 중간고물상을 거쳐 집하장으로 이동된다. 집하장은 고물상과 달리 폐지 집하장, 고철 집하장, 빈 병 집하장 등 종류별로 분류돼 있다. 각각의 집하장에서 모인 고물들은 트럭으로 다시 폐지 공장, 제철 공장으로 옮긴다. 폐지 공장에서 모인 종이들은 다시 종이 질에 따라 나눠서 녹인 뒤 재생종이를 만들어 재활용한다. 고철도 마찬가지. 철의 종류와 질에 따라 분류한 뒤 재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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