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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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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사람들 | 권보드래

등록 2006-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모처럼 평일 오후 목욕탕에 들렀다가 아줌마들의 왁자한 수다판에 끼었다. 아니, 끼었다기보다 방청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한 평쯤 되는 좁은 사우나실에 대여섯 명 부대가 있는데 살짝 침입을 했으니 말이다. 아줌마들은 한창 주말 모임을 회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어구이에 가리비찜이 등장하고, 번개탄과 참숯의 차이점이 거론되고, 우물물의 양부(良否)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는 동안, 한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내 입 안에도 한가득 군침이 고였다 사라지곤 했다. 아줌마들은 고스톱판을 되새기다가 금강산 여행을 계획하는가 하면, 박카스에 커피를 돌리고 홍탁과 과메기의 가치를 갑론을박하다가, 이제 마사지 가야 할 시간이라며 우우 몰려나가 버렸다.

저 양반들 사회적 좌표가 뭐야?

으음. 도대체 전천후,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자세를 떨치지 못하는 까닭에, 순식간에 조용해진 목욕탕 안에서 뭔가 ‘판단’을 내리려는 습관을 발동시켜본다. ‘판단’이 아니라면 적어도 ‘해석’을, 저 양반들의 사회적 좌표에 대한 진단이라도 내려두고 싶다. 두어 명을 아파트 이름으로 불러댔는데, 그 이름으로 미루어보면 그만저만한 살림일 거다…. 하긴, 우리 동네 최고의 아파트로 꼽히는 내 사는 아파트가 전세 시가 9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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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몇 명은 별장이라도 있는 듯한 말투였는데? 강원도 어디가 낫네 관리하는 데 애로가 있네 하더구만? 아니지,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참 들었는데, 결국 배추 매는 일이나 이삿짐 그릇 포장하는 일을 하는 분네들이었지? 보통 일당은 4만원인데 기술이 있어 5만원이라고 뻐기던 사람도 있었는데? 대략 40대에서 60대까지 걸쳐 있는 그분네들의 좌표를 정해보려다가, 결국은 제풀에 지치고 만다. 역시, 세상은 오묘해.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온 지 3년이 다 돼간다. 서울 요지에서 변두리로, 다시 경기도로, 이사할 때마다 동네마다 다른 풍토에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이 동네의 이질성은 특히 재미있다. 집 앞 정육점 아주머니는 고기 손질하면서 으레 바람난 남편 걱정을 질펀하게 늘어놓는다. “아, 왜 저기 청대문집 몰라요? 거기 과부가 그렇게 밤낮 없이 전화를 한다니까.” 잘난 남편 인물값 하기 마련이라며 걱정 반 자랑 반 푸념을 하더니, 어느 날은 드디어 집을 나가버렸다며 탄식을 쏟는다. 그러나 며칠 뒤 가보면 아저씨는 멀쩡한 얼굴로 고기를 자르고 있고, 아주머니는 뼈를 좀 고아 먹여야겠네 어쩌네 하면서 한창 부산하다. 집 앞을 지나는 수영장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기사 아저씨는 어떻다더라? 작달막하니 운전석에 붙어앉아 잠바때기나 걸치고 있는 그 아저씨는 알아주는 땅 부자라고 들었다. 동네 토박이인 까닭에 여기저기 땅을 지금도 갖고 있어, 빌딩 올리고 재산 불리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이다. 심심해서 안 된다며 굳이 기사 노릇을 하는 그 아저씨는 가끔 대리 기사를 고용하고 해외 여행에 나서신다나.

그 사각지대가 희망의 원천

서울에서 고작 10km쯤 떨어져 있을 뿐인데도 우리 동네는 내 머리론 이해되지 않는 일투성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곶감을, 산책길에서 갓 딴 호박을 건네주는 사람들은 차라리 익숙한데, 직업이며 재산이며 취향이 통 가늠되지 않을 때는 영 어리벙벙하다. 하긴 지난번 살던 동네에서도 조금은 그랬으니까. 아파트가 들어선 지 오래 되지 않은 산동네, 옆 단지에선 아파트 광장에서 한가위 대축제며 노래자랑대회 등을 열곤 했고, 그 ‘전국노래자랑’풍 분위기도 어쨌든 낯설었다. 그러고 보면 ‘근대’의 ‘도시생활’이라는 척도로 가늠할 수 있는 세계는 뜻밖에 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치 김유정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끝끝내 해독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동네 사람들의 생동감 역시 내 옹색한 소견으로는 짚어내기 힘들다. 정치로도 경제로도 계급적 관점으로도 잘 잡히지 않는 그 사각지대가, 그러나 때론 희망의 원천처럼 비친다. 선거에도 무관심하고 초월을 꿈꾸지도 않는 목욕탕 여자들, 그 아줌마들이 “왜에, 살 만해, 사는 게 어때서?”라며 고개를 주억거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이, 전천후 먹물, 뭐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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